저 어렸을 적, 초등학생에게 주어진 미술재료란 수채화물감과 크레파스(오일 파스텔)가 고작이었지만, 풍요로운 물질적 혜택을 받는 요즘 아이들은 다양한 연필, 사인펜, 색연필, 수채화물감, 크레파스(오일 파스텔)를 충분히 누리고, 많은 경우 수채화 색연필과 파스텔까지 다룹니다.
하지만 통상 유화재료는 초등학생에게 제공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어렸을 적엔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했어요. 마치 유화는 미대생이나 작가가 다루는 재료란 인식이 있었죠. 물론 유화물감이 상대적으로 고가의 재료고, 터펜타인은 아이들에게 위험 요소가 있기에 그렇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지나쳐요. 그런가 하면 크레파스로 통칭되는 오일파스텔은 여전히 어린이용 재료로 여깁니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던 옆지기는 방학 때 한국 들어오면 오일파스텔(크레파스)을 구입해 갔다 합니다. 질 좋은 오일 파스텔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어린이용 화구를 왜 대학생이?”라며 깜짝 놀라 질문하는 저에게, 옆지기는 “피카소가 즐겨 사용한 재료인데?”하며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오일파스텔에 대하여 공부해 보니, 크레파스는 특정회사 상품명이고, 재료의 공식 명칭은 오일파스텔이며, 유화(오일페인팅) 재료 중 하나이어서 린시드 오일과 터펜타인에 녹는 성질을 지녔습니다. 오일파스텔보다 좀 더 무른 성질로는 ‘오일바’라는 재료도 있습니다. 물을 기반으로 한 수채화물감이 물에 녹아 섞이는 것처럼, 유화물감뿐 아니라 오일파스텔과 오일바는 기름을 기반으로 한 유화재료이기에 기름에 녹습니다.
예술을 전공하다 보면 편견과 선입견을 깨뜨리는 훈련을 많이 받습니다. 미술사를 공부해 보면 역시 앞선 세대의 것을 깨뜨리고 넘어서는 것의 반복이고요. 그래서 예술가들은 “왜 꼭 그래야만 해?”라는 질문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크레파스는 어린이용 화구’라는 선입견을 깨뜨리지 못했던 거죠. 수없이 깨뜨리고 스스로 깨졌다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 선입견이 여전하다는 것. 그러한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이 있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이 아직 들어서지 않은 아이들. 그래서 아이들은 엉뚱한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때로 예술가들은 그로부터 영감을 얻곤 합니다. 많은 어른들이 ‘틀렸다’고 여기는 방식들로부터 말이죠.
우리 어른들이 미술 작업하는 아이들을 대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결국 우리의 선입견입니다. 가장 먼저 ‘미술작업엔 단계가 없다’라는 것을 명심해야 해요. 크레파스 다음 수채화, 수채화 다음 유화와 같은 단계가 없고 그림 크기의 단계가 없답니다. 오일파스텔(크레파스)이 유화재료라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결국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유화를 다루고 있어요. 유화용 린시드 오일을 구입하여 오일파스텔(크레파스)을 즐겨보세요. 붓에 린시드 오일을 묻혀 도화지 위에 그린 크레파스를 비벼보면 천천히 녹습니다. 오일이 건조되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한 만큼, 작품에 정성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아이들이 몸으로 익힐 수도 있어요. ‘피카소 오일파스텔'로 검색하여 멋진 작품을 아이와 함께 즐기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미술을 배워 본 적 없는 성인 대상 수업을 해보면 ‘재료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주문을 받곤 합니다. 심지어 고전적 기법을 탈피한 현대작가들의 새로운 기법을 가르쳐달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해요. ‘그 예술가들은 왜 그렇게 그렸는가'에 대해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과거의 전통적 기법을 깨뜨린 것은 단순한 반항이나 저항이 아닌, ‘작품에 담아내고자 하는 것’에 집중한 결과입니다. 담아내고픈 감정과 이야기는 과거의 기법과 스타일만으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새로운 스타일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 새로운 스타일을 정형화하고, 그 스타일과 기법만을 탐구한다면 또 하나의 선입견에 스스로를 포박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은 그림에 담아내고자 하는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수채화 물감을 뻑뻑하게 사용할 수도 있고 유화물감에 기름을 많이 섞어 투명하게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저 수채화는 물과 친하고 유화는 기름과 친하다는 기본 성질만 제시하고 수없이 많이 사용하다 보면 재료의 성질은 스스로 체득하게 됩니다.
아이가 작업할 땐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다양한 재료를 주변에 늘어놓아 보세요. 호기심으로 사용하는 엉뚱한 재료의 배합이 멋진 새로운 시도가 되곤 하거든요. 때로 아이들은 그렇게 얻은 결과물이 좋아 동일한 방식을 되풀이하곤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스타일을 찾고 발전하는 건 어른 예술가나 아이나 꼭 같아요. 아이가 작업할 때 다양한 재료를 주변에 놓아주고, 안전과 위생에 문제없는 한 자유로운 재료 사용에 제한을 주지 말아요. 때로 그림에 물건을 붙이기도 하고, 테이핑을 하기도 하고, 만들기를 하다 색칠을 하기도 합니다.
화방이나 문방구에서 저렴한 재료로 즐길 수 있는 재료를 추천드려봅니다. 오일파스텔(크레파스)과 린시드 오일의 조합. 색상 종이테이프와 수많은 재료들의 조합. 파스텔과 목탄. (파스텔과 목탄은 상이한 성분이지만 멋지게 어울립니다.) 수성사인펜과 유성사인펜(매직)과 수채화물감의 조합. (수채화물감은 연필, 볼펜, 목탄, 파스텔, 따지지 않고 모두와 잘 어울립니다. 재료 사용 순서도 없습니다.) 잉크와 다양한 펜촉도 무궁무진한 표현을 열어줍니다.
[달팽이] 종이위에 파스텔과 금속. 2016년 임유빈.(초3)
[자화상] 종이 위에 종이테이프와 잉크. 2019년 송민준(중1)
[시간] 종이 위에 펜. 2015년. 임유빈 (초2)
[나무] 종이 위에 파스텔과 수채화 물감. 2015년. 임유빈 (초2)
[고양이] 포장지 위에 오일파스텔과 린시드오일. 2015년. 임유빈 (초2)
[달] 캔버스 위에 유화. 2017년. 임유빈 (초4)
[여행지에서 본 풍경] 검은종이 위에 오일파스텔. 2015년. 임유빈 (초2)
[십자맨] 종이팔레트 위에 오일파스텔, 린시드오일. 2022년 송재민 (초5)
[십자맨] 박스종이 위에 오일파스텔, 린시드오일, 아크릴물감, 연필. 2022년 송재민 (초5)
[나무] 종이 위에 오일파스텔과 오일. 2022년 김별(초3)
[강아지 솔이] 종이 위에 파스텔. 2023년 김별
[소녀] 박스종이 위에 펜. 2020년 김별 (초1)
[내가 좋아하는 것들] 2019년 김별
[봄] 종이 위에 파스텔과 나뭇가지. 2020년 김별
[꿀벌] 식판 위에 마카펜과 오브제. 2022년 김별 (초3)
[나무] 종이접시 위에 파스텔, 풀, 오브제. 2022년 김별(초3)
[낙서] 2020년 김별(초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