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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준 Mar 19. 2024

4. 망친 그림은 없다, 우리는 망치기 위해 그린다.

“학생들은 토르소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아? 한 조각가가 전시를 앞두고 대리석으로 인체 전신을 조각하고 있었어. 전시 오프닝을 하루 앞둔 저녁, 얼굴 부분을 망치와 정으로 다듬는 중이었지. 땅땅땅… 한순간 쩍 소리가 나더니 목이 부러진 거야. 얼굴이 땅으로 떨어지며 부서지는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오른 조각가는 팔다리 모두 부수곤 밤새 울며 술을 마셨어. 해가 뜰 때쯤 온전히 남은 몸통을 바라보니 색다른 아름다움이 있는 거야. 그래서 몸뚱이만 전시하며 제목을 토르소라 했대.”


전공자를 위한 유머, 전공자들은 상상만으로도 그 고통을 통감하기에 웃음의 크기도 다릅니다. 물론 저 이야기는 꾸며낸 농담입니다. 하지만 창작의 열정을 불태우며 좌절과 환희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 순간 토르소의 이야기가 의미 없는 유머가 아님을 깨닫게 되죠. 고민과 노력으로 점철된 지난한 작업 과정 중 발생하는 실패는 때로 멋지고 새로운 창작어법으로 돌변한다는 진실.


현재 대학생이 된 홍담이가 초등학생이었을 적, 한참 유화를 그리던 홍담이는 책상에 굴러다니는 박스 종이에 화이트-수정펜으로 낙서를 시작했습니다. 홍담이는 화이트-수정펜이란 도구를 그날 처음 봤다고 했고, 화이트-수정펜과 펜과 파스텔을 조합하여 그림을 그렸죠. 긴장을 풀고 힘을 풀고 부담감을 내려놓았지만, 유화작업에서의 고민과 노력과 집중력은 마치 관성의 법칙처럼 낙서에도 이어졌습니다. 그 낙서 작품을 소중히 다루며 감탄하는 제게 “어우 선생님~, 선생님은 왜 망친 그림을 좋다고 하세요~”라고 했고, 아이에게 저는 왕가위 감독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바오밥 나무] 박스종이 위에 펜, 화이트 수정팬, 파스텔    2015년 김홍담 (초5)


감독 왕가위는 [동사서독] 촬영과 편집이 지나치게 길어져 슬럼프에 빠집니다. 그래서 기분 전환용으로 홍콩에 잠시 귀국하여 촬영한 것이 [중경삼림]이었다고 해요. 23일에 불과한 촬영 기간에 탄생한 중경삼림은 왕가위 대표작으로 올라섭니다.


예술가들에겐 때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가볍게 즐긴 작업이 특별한 작품으로 기록되곤 합니다. 때론 토르소처럼, 순간의 실수로 망친 작품으로부터 우연하고 특별한 표현을 발견하여 자신만의 스타일로 승화시키기도 합니다. 그 한 장면만 바라보면 우연이지만 노력하지 않은 자는 그 우연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망친 폐기물로 버립니다. 노력과 고민이 켜켜이 쌓인 퇴적의 두께만이 사소한 우연을 멋진 필연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실력이라 일컫습니다.


운전하는 창밖으로 연분홍빛 구름이 저녁 시간을 알려주던 어느 날, 라디오 DJ가 들려줬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천재라 알고 있는 모차르트, 그의 알려진 유명한 곡도 그가 남긴 곡의 1%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예술가들은 한 번의 대작을 위해 구십구 번의 평범한 작품을 위해 혹은 망친 작품을 위해 전념을 했다는 얘기죠. 그 과정은 무척 지난하고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잘 풀리지 않는 그림에, 망친 그림에 화가 차올라 그림을 마구 그리다가 며칠 쉬고 돌아와 보면, 진정된 마음과 환기된 눈으로 그 그림을 다시 돌아보면, 망쳤다고 여겼던 작품으로부터 특별함을 느끼는 경우가 예술가들에겐 종종 있답니다. 마치 팔다리 얼굴이 잘려 나간 토르소의 아름다움처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왜 실패했는지 정확히 분석하고 깨달았을 때 우리는 실수를 거듭하지 않고 큰 성공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예술에 있어서 실수와 실패는 이와 조금 다른 결을 지닙니다. 실수와 실패 속에서 새로운 표현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요. 때로는 실패한 김에 평소에 해보지 않았던 과감한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실수와 실패는 커다란 성장을 이끄는 중요한 동력 중 하나입니다.


원하는 대로 그림이 안 나오면 다시 그리면 됩니다. 실패하면 또 그리는 겁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고집스레 가는 겁니다. 그렇게 몰두하다 한 걸음 떨어져 나와 보면 멋진 우연이 내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망칠까 봐 조심스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망치다 보면, 계속 망치다 보면 어느덧 원하던 결과를 얻기도 하고, 어느 순간 멋진 우연이 다가오기도 하니까요.


이것을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잘 그린 그림에 대한 선입견'이 없어야만 합니다. 특히 선생이나 부모께서 이 진부한 선입견을 떨쳐내지 못하면 예술이 학교 성적처럼 타인과 비교당하는 결과물로 존재합니다. 그런 환경에선 실패가 기막힌 우연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뒤처진 낙오로 다가오며 절망으로 느껴집니다. 어찌 보면 예술에서 실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어른으로부터 인정받은 성공일 수도 있습니다. 커다란 칭찬과 함께 주목받은 아이는 과감하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니까요. 1등에서 꼴찌로 하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인정받은 스타일에 머무르고 새롭고 과감한 시도를 거부하며 발전 없는 정체기를 맞이합니다. 예술창작에서는 정체기가 아니라 도태일 수도 있습니다. 


저희 선생들은 아이들에게 종종 “우리는 망치기 위해 그린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실패하기 위해 시도하니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내달릴 수 있고, 그 과정을 즐길 수 있고, 과정과 결과에서 얻는 우연을 실력으로 장착하는 것, 그렇게 하나씩 찾아내는 자신만의 가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는 것, 긴 시간 동안 거듭되는 경험을 통해 몸으로 기억하는 것. 우리 아이들이 예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 중 하나일 겁니다.


망친 그림은 없습니다. 정성스런 실패는 누구도 닿지 못했던 성공으로 나를 이끌어주니까요.


[무제] 종이 위에 수채화 물감, 한지와 다양한 오브제.   2020년. 김사랑(초2)

다양한 색으로 그리던 사랑이는 흰색으로 덮으면서 전체 구성이 변하는 첫 시도가 이뤄졌고, 스크래치로 이야기를 전개 시킴과 동시에 화폭 위의 색상을 혼합함으로써 전체 구성을 두 번째로 바꾸었고, 그 위에 한지와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하여 전체 구성을 다시 한번 바꾸며 이야기를 진행하였습니다.






위의 세 그림은 2023년 당시 금촌초 6학년이었던 김윤우 학생의 작품입니다. '망친 그림은 없다, 사소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에서부터 특별함을 끌어낸다.'는 선생의 이야기를 이해한 윤우는 망친 파스텔 그림 위에 물감으로 완성하거나, 친구가 망쳤다고 버린 종이를 주워다 그림을 완성하곤 했습니다.




[별이 있는 풍경]   종이 위에 수채화물감, 파스텔, 점토.   2018년 박다인 (초4)

물감 그림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다인이는 종이와 같은 색상의 파스텔을 이용하여 새로운 시도를 하였습니다. 파스텔 위에 물감 작업은 많이 시도해 보았지만, 물감 위에 파스텔이라는 새로운 시도에 선생들도 감탄했답니다.



[무제]  종이 위에 사인펜  2023년. 권순혁(초5)



[무제]  종이 위에 수채화 물감 2017 장재은(7세)

흰 종이 위에 흰색 물감을 먼저 흠뻑 칠한 후 그림을 그렸던 시절입니다. 반쯤 마른 흰색 물감 위로 칠해지는 색깔들은 흰색과 묘하게 섞이며 그림이 완성되어 갑니다. 재은이는 우연히 마주한 이 방법으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답니다.



    나무 위에 펜촉, 파스텔.   2023년 오화영(4학년)

처음부터 망치는 것에 두려움이 없던 화영이, 실수로 물감이 묻고 손자국이 나도 개의치 않고 작업을 이어가기에 거칠고 즉흥적 매력을 한껏 뿜어낼 수 있었습니다.



연필 드로잉,  2023년. 김별.

강아지를 그리던 어느날,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별이는 연필을 주먹으로 쥐고 신경질적으로 그어 댔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림은 강아지의 역동적 동세에 잘 어울렸고, 아이는 강하고 거친 선을 자신만의 선으로 만들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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