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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aleopard Apr 27. 2024

루쉰을 잠깐 읽고

늘 그렇듯이 루쉰을 잠깐 읽었다. 전집 4권이다. 


"중국인은 양에게는 맹수의 모습을 드러내고, 맹수에게는 양의 모습을 드러내는지라, 설사 맹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비겁한 국민이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틀림없이 끝장나고 말 것이다. 생각건대, 중국이 구원을 받으려면 무언가를 보태 넣을 필요가 없다. 젊은이들이 예로부터 전해져 온 이 두 가지 성질의 사용법을 뒤집어 사용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즉 상대가 맹수와 같을 때에는 맹수처럼 되고, 양과 같을 때에는 양처럼 되라! 그렇게 되면 어떤 마귀라도 자신의 지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퍼런 칼날이 앞에서 번뜩이고 뜨거운 불길이 뒤에서 타오를지라도, 책상에 달라붙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창작의 충동'을 내가 언제 가져 본 적이 있었던가. 이러한 충동이 순결하고 고상하며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내게 없는 데야 어찌하랴. 며칠 전 아침, 어느 친구가 나를 째려보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마음에 영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자못 무슨 충동이 생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중에 늦가을의 찬바람을 쏘이자, 달아올랐던 얼굴은 원래대로 식어버렸다. 창작은 없어졌다. 이미 출판된 나의 글들은 쥐어짜 낸 것이다. 이 '쥐어짜다'라는 글자는 소젖을 쥐어짠다고 할 때의 '쥐어짜다'이다. 이 '소젖을 쥐어짜다'라는 건 오직 '쥐어짜다'라는 글자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일부러 나의 작품을 우유에 비겨서 유리병 속에 담아 '예술의 궁전' 따위로 들여보내 주길 바라는 건 결코 아니다. (...) 그래서 글을 쓰고 나면 그만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출판업자가 아무리 훔쳐가고, 문인이 뭐라고 지껄이든, 더 이상 마음을 졸이지 않았따. 그러나 내가 믿고 있는 사람이 보고싶어 하고 훌륭하다고 칭찬하면, 기쁘기 한이 없었다. 나중에 묶어서 찍어내기도 했는데, 솔직히 말해 돈 몇 푼을 벌기 위해서였다." 


"나의 글이 중국 글 중에서 꽤 신랄한 편이며 말도 가끔 사정없이 한다는 것을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공리와 정의라는 미명과 정인군자라는 휘호 및 온유돈후한 거짓 얼굴과 소문 및 여론이라는 무기, 알아듣지 못하게 빙빙 둘러 말하는 글을 가지고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하고 사사로이 행하는지를, 그리고 펜도 없고 칼도 없는 약자를 어떻게 숨도 못 쉬게 하는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만약 나에게 이 붓이 없었다면 나도 모욕을 당해도 호소할 데가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를 깨달았고 그래서 항상 붓을 사용하고 있다." 


"도사들이 '삼시신'에게 하는 짓은 더 대단하다. (삼시신은 도교에서 사람 몸속에서 재앙을 초래하는 '신'을 가리킨다. 경신일이 되면 삼시신은 하늘로 올라가 하느님에게 사람의 죄악을 일일이 고한다는 설이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경신을 지키'는데 곧 이날 저녁에 밤을 새서 잠을 자지 않으면 피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도사가 되어본 적이 없어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남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도사들은 사람 몸에 삼시신이 있으며 어느 날이 되면 사람들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승천하여 자신의 죄악을 아뢴다고 여겼다. 이는 인체 자체에 깃든 첩자로 『봉신전연의』에서 늘 말하는 '삼시신이 격노하여 일곱 구멍에서 연기가 났다'는 삼시신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지만 그를 제지하는 것은 의외로 어렵지 않다고 한다. 그가 승천하는 날이 일정하며 이날만 자지 않으면 그는 승천할 틈이 없어서 죄악을 뱃속에 넣어두고 내년에 다시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우리 중국인은 귀신에 대해서도 이런 방법을 갖고 있다. 우리 중국인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믿지만 귀신은 사람보다 더 어리석다고 생각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그를 처치한다. 사람에 대해서는 물론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특별한 방법을 써서 다스리고 다만 말하지 않을 뿐이다. 당신이 발설하면 당신은 그를 무시한 것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확실히 자기는 비밀을 꿰뚫어봤다고 생각했던 것이 때로는 정반대로 얕은 수에 지나지 않을 때도 있는 것 같다." 


"중화민국 15년 3월 25일은 18일 돤치루이 집정부 앞에서 살해당한 류허전, 양더췬 군의 추도회가 국립베이징여자사범대학에서 열린 날이다. (....) 정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인간 세상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만 든다. 40여 명 청년들의 피가 우리 주위에 흘러넘쳐서 나는 호흡하고 보고 듣는 것도 힘들 지경인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긴 노래가 통곡을 대신하는 것은 필시 고통이 가라앉은 뒤이다. 그리고 이후에 나온 이른바 학자 문인 몇몇의 음험한 논조는 나를 더 슬프게 했다. 나는 이미 분노의 경계를 넘어섰다. 나는 인간 세상이 아닌 이곳의 짙고 어두운 슬픔과 처량함을 깊이 음미하려 한다. 인간 세상이 아닌 이곳에 내가 드러낼 수 있는 최대의 애통함을 드러내어서 그들을 기쁘게 하고, 이를 뒤에 죽을 자의 변변치 못한 재물로 삼아 죽은 자의 영전에 바친다. 진정한 용사는 참담한 인생을 대담하게 마주하고 뚝뚝 흐르는 선혈을 용감하게 정시한다. 이는 얼마나 애통하고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나 운명은 종종 평범한 사람을 위해 설계된 법으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옛 흔적은 씻겨 사라지고 담홍색 피와 희미한 슬픔만을 남길 뿐이다. 이 담홍색의 피와 희미한 슬픔 속에서 또 다시 사람은 잠시 구차하게 생을 이어가고 이렇게 인간 세상 같으면서 비인간적인 세계는 유지된다. 이런 세상이 언제 끝이 날지 나는 모르겠다! (...)"



1. 백화번역과 문언문 번역이 다르며, 같은 백화번역도 문언문 느낌으로 하는지 백화 느낌으로 하는지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 루쉰 전집은 확실히 반-문언문적인 경향이 있고, 그래서 일본에서 전후에 수용된 루쉰의 이미지와 무리 없이 결합하는 느낌이 있다. 구어로 문학적이며 아름답고 말하는 루쉰의 이미지 말이다. 저 '옛날 사람' 루쉰 말고. 


2. 루쉰은 맨손 시위가 무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몇 명이 죽은 것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는 비관적이다. 비관적이지만 울분이 글에 스며있다. 흘린 피가 "희미한 희망"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어째서 희망은 희미해야 하는가? 루쉰 자신이 감히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름으로써 더 많은 피로 더 많은 희망을 불려나가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맨손 청원이 숭고하다거나 평화적이라서 위대하다거나 하는 "너머의 심오한 의미"를 그는 믿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으며 입에 올리고 싶지조차 않을 정도로, 그 자신 까다로운 감각의 소유자이고, 어두운 비분이라는 정동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맨손 시위에 심오한 의미가 없다는 것도 맞고, 희망이 희미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맞다. 맨손 시위가 무력하며 그저 고결한 사람들이 죽을 뿐이라는 사실이, 반드시 맨손 시위로부터 뿜어져나오는 희망의 물줄기를 약화시켜야 될 하등의 이유도 없다. 맨손 시위가 특별히 무력하다는 인식은 참으로 "붓"에 의지하는 지식인다운 것이다. 맨손 시위가 특별히 무력하면 특별히 유력한 다른 것은 무엇인가, 기관총? 기관총이 유력하다면 맨손시위'도' 유력하다. 맨손시위가 무력하다면 기관총도 무력하다. 기관총을 중시하는 것만큼 맨손시위도 중시해야 한다. 루쉰의 스타일은 이렇게 가볍지 않다. 그는 여러 글에서 드러나듯이 무겁고 침통하거나 격렬하고 폐부를 찌르는 스타일을 선호한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조금도 특별하지 않다고 선언하지만 그의 글은 正이 아니라 奇에 속하고 本이 아니라 末에 속한다. 그의 특별함은 그의 문체에서 나온다. 그의 문체는 이론이 아니며 canon도 아니고 외울 수 있는 게 아닌 듯한 인상을 준다. 마오쩌둥은 언젠가 루쉰이 아직 살아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냐는 질문을 받고 아마 감옥에 있을 거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전집 4권은 20년대 중반의 글들을 담고 있으니, 말년에 그가 중공의 理義에 얼마나 보조를 맞췄는지, 노인 루쉰이 50년대까지 살아남았다면 정말 감옥에 가야만 했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4권만 봐서는 그야말로 감옥에 있었을 거라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3. 대부분의 중국 글들처럼, (아니, 실은 루쉰의 글이 '중국 글'의 한 전형처럼 느껴지는데) 루쉰의 글은 재밌다. 내가 "루쉰의 문체"라고 부르는 것은 요컨대 "희미한 희망" 운운하는 것들이 대개 그 중심에 있는 것이고, 가령 다음과 같은 부분은 "루쉰의 문체"가 아니라 "중국인의 문체"라고 본다. "즉 상대가 맹수와 같을 때에는 맹수처럼 되고, 양과 같을 때에는 양처럼 되라! 그렇게 되면 어떤 마귀라도 자신의 지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말을 최근에 문 모씨가 다르게 했는데, 그 글은 읽고 영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었지만, 루쉰의 이 글은 읽을수록 기분이 좋아진다. 스스로 예술적 야망 따위 반푼어치도 없다고 중얼거리는 루쉰은 내게는 무슨 특별한 매력은 없다. 하지만 그 내용을 소젖을 쥐어짜네 어쩌네 하는 그 사설 그 가락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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