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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aleopard Jul 09. 2024

작가 연기자 무기통제사

스피노자는 2종인식과 3종인식을 말한다.

254의 제곱을 계산해서 아는 것은 2종인식이고 2의 제곱을 계산하지 않고도 4임을 직관적으로 아는 것은 3종인식이다. 3종인식은 2종인식의 바탕 위에 성립하는 일종의 직관이다. 직관이라는 거 자체만 놓고 보면 활연관통하여 사물의 전 측면에 이르지 않는 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주자학과 스피노자의 차이가 첨예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3종인식이 아니라 2종인식이다.

2종인식은 공통개념에 기반한 것이다. 공통개념은 공리와 거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지를 의미한다. 증명이 필요없는 명제.


결국 수학적 사유의 연습을 통한 명석판명한 이해의 획득이 요청된다.

반면 주자학의 격물치지를 통한 활연관통은 어떠한가,


주자학의 연원에 있는 선불교는 이렇게 본다.

특히 구체적인 방법은 공안, 즉 선승들의 가르침이다. 그 내용은? 원숭이를 잃어버릴까봐 걱정하는 마음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원숭이를 묶은 줄을 꽉 쥐고 있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원숭이를 몽둥이로 때려죽여야 걱정의 사념을 없애버릴 수 있다.

요는 일용응연처, 일상의 천변만화에 즉하여 민첩하고 준엄하게, 활발하고 과감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바로 행동해야 한다. 눈알 굴려도 안 되고, 지식의 박람강기에 의지하려 해도 안 된다.

그 결과로 본래의 면모를 홀연히 깨닫는다는 것이 선불교의 방향성이다. 선불교는 본래, 일자의 회복, 깨달음을 중시하고 다수, 지엽말단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주희는 그에 비해 출발점으로서의 지엽말단을 중시했다. 종밀도 종고의 돈오주의를 비판했지만 그것은 불교 교리의 복잡화에 의한 것이어서 일상인륜과는 오히려 더 멀어지는 방향이었다.


서리와 눈의 참혹함에서도 생의生意를 발견하는 유학은 불교의 주체성이 전체와의 단절에서 나오는 것에 반해 전체와의 연속에서 그 주체성을 발견하려고 한다.


스피노자는 마음에 근본하기보다 하늘에 근본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학과 불교의 차이는 객관과 주관의 스펙트럼 상에서의 입장차이라고 거칠게 정리할 수도 있다. 그들은 유냐 무냐, 이것을 가지고 대립했다. 천지에 오직 하나의 리만 있을 뿐이며 그것은 단순한 공이나 무일 수 없다는 데에는 스피노자도 동의했을 것이다. 불교가 리를 거부한 까닭은 그것을 말하기 시작하면 거기에 구애되고 집착한다고 생각해서다.

집착 없이 말하기. 집착 없이 의론하기. 이것이 주자학의 과제였다.

비질하고 인사하는 일의 무수한 반복, 성의를 다하는 일의 무수한 반복, 주자학은 이런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격물치지의 무수한 반복. 그런데 이것은 집착이 아닌가? 비질하는 것에, 인사하는 것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집착없는 언어는 스피노자의 기하학 아닌가?


오랜만에 워치맨 근접조우 티카스 사례들을 듣고 있자니 그때 참 재밌었는데 싶다. 잘해야 본전인 업무! 정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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