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이 정치를 못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의대증원이라는 맥락에서 나왔던 말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런 걸까?
<분열병과 인류>를 읽고 한 생각이다.
나카이 히사오는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은 훌륭한 정신과의사였는데 동시에 원어로 푸코와 세르토를 읽으며 훌륭한 저작을 많이 남긴 르네상스적인 인물이다.
그런 사람 앞에 서면, 실천이 부재한 인문학의 공담이 쑥스러워지고, 분열병에 대한 그의 이러저러한 접근이 뿜어내는 강한 카리스마에 이끌리게 된다.
문무양도가 있다면 이런 것일 터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미시마는 역시 작가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의사들은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시마가 이것을 몰랐을 리 없다. 알면서도 그는 작가를 택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결국 나카이 히사오의 글과 삶이 지닌 어떤 '교양주의'의 범용함 때문일 것이다.
노도와 같은 선동의 언어도 없고 격렬한 비분강개의 토로도 없다. 감정이 억제되어 있으면서도 다양한 '모노'에 대한 차분하고 성실한 기술, 그 배후에 서려있는 미약한 냉정함. 본질적이고 전면적으로 핵심을 다루지만, 그것은 오직 우아하기 때문에야말로 싱겁게 표현되고 만다. 이러한 평범하지 않은 평범함에 대한 자부, 오만, 독선이 그의 글에 어쩐지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누가? '어리석은 민중'들이. 의사협회의 속류화된 언설은 언급할 가치가 없지만, 내 생각에 의사가 발신하는 담론의 최상의 형태조차 정치에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을 텐데, 바로 거기에 간과하기 어려운 흥미로운 문제의 일단이 집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학은 그것이 정치와 등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미시마 같은 귀족을 지향하면서도 귀족에 만족하지 못했던 청년들까지 끌어들였던 것이다. 미시마의 정치성이나 탈정치성을 논하는 것보다 나카이 히사오와 정치의 관계를 논하는 것이 훨씬 흥미롭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요컨대, 나카이 선생의 글이 보여주는 겸손하면서도 강렬하고, 온화하면서도 굳건한 정의의 좁은 길이 두드러지면 두드러질수록 나는 언제나 요즘 사람들의 혐오의 대상이 되는 정치 이데올로기, 오히려 그 정치 이데올로기의 성실함과 차분함과 냉정함과 우아함과 싱거움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나카이 선생과 모택동 사이에는 현미무간의 지극히 미묘한 차이만이 있다고 보는 셈이고, 그 호리지차, 털 한 끝의 차이가 천리의 차이를 만든다고 보는 셈이다. 그 두 사람이 (정확히 그렇게는 아니지만) 각각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봤을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