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근황이 궁금했을 것이다. 요즘 머피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머피는 여전히 즐거운 나의 집에서 지낸다. 가끔 아침에 머피가 보이질 않을 때가 있다. 한번 찾아볼까? 숨은 머피 찾기!
머피가 밖으로 나갔다 들어왔다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캣 도어는 언제나 열려 있다. 낮에는 가끔 머피와 함께 똥파리가 날아들어온다. 어쩔 때는 귀뚜라미가 들어오기도 한다. 나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볼 때는 귀뚜라민데, 사실 잘은 모르겠다. 생긴 건 비슷한데 유난히 시커멓고 꼬리는 서너가닥의 뿔 같은 게 있긴 하다. 네이버에 검색한 귀뚜라미와는 사뭇 비슷한데 살짝 다르기도 하고. 뉴질랜드 귀뚜라민가 싶다. 밤에는 나방들과 함께 들어온다. 나방이 캣도어가 열리는 순간 들어올 때도 있고, 머피의 털 속에 살포시 얹혀서 들어올 때도 있다. 그리고 작은 붉은 개미는 뭐 함께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머피가 들어오면 얼른 가서 벌레를 살펴보고, 물티슈를 닦아 주는데 문제는 발톱이 무척 날카롭단 거다. 종종 머피로 인해 상처가 난다.
집에 놀러 온 손님에게는 상처를 보여주며 만지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머피를 대하는 한국인과 키위의 차이가 있다. 먼전 한국인은 "응? 병원에서 예방 접종 다 하고 약도 먹고 그랬을까? 이렇게 집 밖에 돌아다니고 막 정원에서 뒹굴고 그러면 벌레가 몸에 있을 것 같은데. 여기는 이랑 벼룩이 일상이잖아. 이나 벼룩 달고 오면 어떻게. 물가도 한국보다 비싼데 병원비도 비쌀 것 같은데. 그냥 키우는 거 아닐까?" 반면 키위는 "그래? 괜찮아. 약 바르면 되지. 여기는 마당 있는 주택이라 대부분 고양이도 자유롭게 키워. 고양이도 자신의 삶을 살 기회를 줘야 하잖아." 가만히 보면 문화적 차이가 있다. 어느 것이 나쁘고 좋다고 볼 수는 없다. 예방 접종도 잘하고, 자유를 주면 좋을 것 같다. 이는 사실 나도 무섭다. 벼룩도 무섭다. 가을이 되면 이가 기승을 부린다. 내가 아는 집 아들도 작년에 이를 옮아와서 그 가족들이 다 걸렸던 적이 있다. 다행히 아직 나는 이를 경험하지 않았다. 학교 픽업을 갔을 때 그 아이의 엄마가 그랬다.
"어떻게. 내 머리에도 이가 있어. 미쳐버려. 그래서 나 어제 머리카락을 좀 잘랐어. 빗으로 빗는데 막 그것들이 호드득 떨어지더라. 그런데 또 왕창 자를 자신은 없더라고. 어쨌든 나 가까이 서있지는 말고 내 앞에 저기 좀 떨어져서 이야기하자. 마트에서 이 전용 샴푸랑 빗을 샀거든. 이라는 생명체를 처음 봤어. 현타가 온다. 하아. 우리 아들 친구한테 이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더니, 걔가 함께 사는 동반자라고 하더라. 이제는 놀랍지도 않아. 벼룩만 없으면 되지 뭐."
머피를 쳐다볼 때면 혹 이가 있으면 어쩌지라는 현실적인 고민은 된다. 그것만 빼면 좋은 가족이다. 조용하다. 단, 외출하고 캣도어로 집안에 들어올 때는 큰 소리로 야옹야옹 거리며 어슬렁어슬렁 걸어온다. 그리고 밥과 물을 먹고 하루 종일 누워 지낸다. 잘 때도 있고 눈을 뜨고 눈알을 굴리고 있을 때도 있다. 혹은 꼬리를 꿈틀꿈틀 거리며 귀를 쫑긋 쫑긋 움직일 때도 있다. 저지래를 하지 않는다. 가죽이나 바닥을 긁거나 하진 않는다. 스크래치를 하고 싶을 때는 캣도어를 통해 마당으로 나가 울타리를 긁는다. 나의 집 울타리는 나무다. 대부분의 집은 울타리가 나무다.
이웃집에는 3명의 자녀가 살고 있다. 딸 둘, 아들 하나. 그 집의 아이들이 한 번씩 나의 집을 찾아온다.
"머피 있어요? 아빠가 데리고 오래요. 안 그러면 고양이가 우리 가족에게 안 올 것 같데요. 그리고 머피가 우리 집에서 똥, 오줌만 싸고 가요."
쪼로미 셋이 와서 항상 둘째가 고양이를 안고 간다. 그러면 10~20분 뒤면 어김없이 캣도어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지나면 누가 또 문을 쾅쾅 두드린다. 나가보면 이웃집 남매가 와있다. 몇 번 고양이를 찾으러 오다 보니 이제는 나의 집에 들어와서 나의 딸과 함께 놀다가 간다. 머피 덕에 자연스럽게 나의 딸은 동네 친구들이 생긴 것이다. 학교에서 만날 때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머피의 안부를 묻는다. 나의 딸이 머피 덕에 학교에서 친한 언니가 생겼다고 얼마나 기뻐하던지. 머피는 여러모로 좋은 가족이다. 한 번은 학교에서 선생님 때문에 속상해서 집에 돌아온 적이 있다.
"엄마. 오늘은 나 좀 부당하다 느꼈어. 그냥 내가 머리가 가려워 긁었을 뿐인데. 집중하지 않고 머리카락으로 장난친다고 혼났어. 그런데 엄마도 알다시피, 선생님이 어렵잖아. 게다가 나는 영어도 잘 못하고. 가려워서 긁었다는 말을 못 했어. 그리고 리딩시간에는 안 떠들었는데 떠들었다고 혼났어. 그때는 I'm not이라고 이야기는 했는데 선생님이 못 들으셨나 봐. 또 수학 시간에는 다 수학 문제를 시켜 주는데 나만 안 시켜줘. 나도 하고 싶다 손들었는데 말이야."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차별은 흔하다. 어찌 되었건 백인 사회니까. 아시아인의 대우가 많이 좋아져서 미묘한 차이를 겪는 것이지 나의 작은 아버지가 처음 왔을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차별을 겪으셨다. 뉴질랜드의 타우랑가. 아름답고 여유롭고 대부분은 친절한 이곳.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차별. 기분에 따라 조금씩 행해지는 차별. 딱 꼬집어 차별이다 이야기 어려운 차별. 영어가 부족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나의 딸의 말을 다 믿으면 안 된다는 학교의 이야기.>
아주 속상하다. 내가 뭐 하러 이곳에 있지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친절하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학교 생활보다는 그래도 여러모로 나은 것 같다. 왜? 일단 나의 딸은 해피하니까. 나의 딸이 이야기하기를
<엄마. 그래도 나는 이곳이 좋아. 대부분 해피하거든. 한국에서는 대부분 안해피 했어.>
어딜 가나 장점과 단점이 있으니, 이 시간이 잘 넘어가길 기도한다. 언제까지나 온실 속 화초로 클 수 없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나쁜 선생님과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를 경험하며 마음 주머니가 단단해지는 어린이가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단, 아이의 날개가 꺾이고, 눈에 띄는 차별을 받는 다면 언제든 그만 두면 된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학교를 마치면 학교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들어주고, 아이의 마음을 살펴주고 다독여 줄 것이다.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인해 속상한 일이 생겨도 집에 오면 머피가 있으니 또 금세 하하 호호 되는 걸 보면 아직 직 어린 게 맞나 보다.
나의 딸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찾는 것도 머피, 학교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함께 노는 친구도 머피, 주말에는 머피의 간식을 사기 위해 마트를 가고, 머피를 위해 장난감을 만든다. 머피가 점점 나의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고양이 화장실이 필요하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구매하려고 했는데, 낮에 머피의 아빠를 만났다.
"우리 머피 잘 지내지? 너 집에 고양이 화장실 있어? 없으면 사지 마. 그래도 내가 가족인데, 너희 집에 고양이 화장실까지 두면 머피는 이제 우리 집 안 올 거야. 두 집을 셰어 하며 사는 건 괜찮지만 영원히 우리 집에 안 온다면 나의 아이들이 너무 슬퍼할 거야. 우리 애들이 종종 너희 집에 가도 될까? 우리 둘째가 머피를 좋아하거든. 너의 딸도 우리 집에 놀러 와도 좋아."
고양이 화장실은 구매하지 않는 걸로 해야겠다. 머피가 양쪽 집을 오가며 지낼 수 있게 말이다.
나의 집에 살고 있는 머피는 이제 없으면 안 되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나 역시도 외출하고 돌아오거나, 집에 있을 때면 "머피? 머피?"라고 이름을 부른다. 요즘은 부쩍 소파에 누워 지낸다. 머피도 폭신한 것을 좋아 하나보다. 내일은 다시 발톱 깎기에 도전해 봐야겠다.
아보카도, 포도, 오렌지, 귤, 매실, 레몬, 대파, 알로에,허브가 자라는 즐거운 나의 집엔 머피가 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