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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Mar 29. 2024

애인

  이불을 바꾸면 미련한 봄이 빨리 올 것 같기도 해서, 서둘러 겨울 이불을 세탁해 개켜 놓고, 봄 이불을 정리하고 있던 때였다. 봄 이불을 빼낸 구석 자리에 여행용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지난봄, 나의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던 투이의 것이었다. 투이는 아직 가방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어쩜, 아니 분명, 그녀는 가방을 찾으러 오지 못할 것이다.  



  게스트하우스로 승합차처럼 생긴 검은색 벤츠 한 대가 들어왔다. 검게 선팅까지 한 차에서 중년의 남자가 먼저 내리고 잠시 후 젊은 여자가 따라 내렸다. 얼핏 보기에도 나이 차가 있어 보이는 커플이었다.


  애인인 것 같지.


  옆에 앉아 있던 준표가 복화술처럼 입술을 달싹이지 않고 속삭였다.


  조용히 해, 인마…….


 나는 준표의 팔을 지그시 누르며 입술을 달싹이지 않고 재빠르게 속삭였다. 준표는 나를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한 번 찡긋해 보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남자가 입구에 있는 안내대로 왔다. 남자가 어제 들어온 한 씨의 일행이란 걸 한눈에 알아봤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여자는 눈과 입이 유난히 돌출되어 쌍꺼풀과 입술이 과장되게 굵직해 보였다. 여자의 생김새로 봐서 필리핀 여성일 거라고 짐작하며, 두 사람을 숙소로 안내했다.


  땅이 녹을 때쯤 인부를 대어 배추 모종을 심고, 밭떼기로 거래를 하는 준표는 배추 수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 여유로 짬이 날 땐 내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게스트하우스를 들르곤 했다. 준표는 한 번 자리를 잡으면 돌아갈 생각이 좀체 없는 사람처럼 층층나무에 달린 해먹에 앉아 느긋하게 핸드폰을 하거나, 나를 붙들고 한참 수다를 떨기도 했다. 성장기를 함께 보낸 사이라 그런지 준표를 보고 있으면 먼 친척뻘이라도 되는 것처럼 혈육의 정 같은 게 느껴졌다. 어느새 마흔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됐는데도 둘 다 결혼 생각이 없다. 준표나 나나 무슨 생각에선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아무 말 없이 피식 웃다가, “싱거운 새끼 징그럽게 웃기는…….”하고 말해 놓고선 괜히 어깨를 치거나 넓적다리를 때리곤 했다. 왠지 결혼을 안 해도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다는 무언의 대화처럼……. 언제부턴가 여자 생각도 없었다. 준표 속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도 나와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침대방과 온돌방을 두고 무엇을 고를까 고민하던 여자는 남자를 힐끗 보더니, 반말로 물었다.


  방 어디 할까?


  여자의 반말에 빠른 시선으로 두 사람을 훑었다.


   너 좋은 방으로 해.


  남자가 말하는 데 꽤 다정한 어조다. 여자는 온돌방과 침대방을 오가며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조사를 뺀 혀 짧은 발음으로 다시 한번 남자의 의향을 물었다.


  자기, 침대방 좋아?


  남자는 신발을 벗고 침대방으로 들어가더니 “침대방이 좋아? 그러면 여기로 해.”라며 다시 다감한 어조로 대꾸하다가, 어쩐지 서먹한 표정으로 방을 나왔다. 나는 뒤늦게 국제결혼이라도 한 부부인지, 준표 말대로 애인인지 살짝 궁금해지려다 괜한 오지랖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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