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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Apr 01. 2024

남자는 58세, 여자는 28세

  어제 게스트하우스로 먼저 들어온 한 씨와 일행들은 배추작업자들을 실어나르는 일을 한다고 했다. 한 씨는 베트남, 필리핀 등 주로 동남아 사람들을 관리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곳으로 숙소를 정한 것은 마을의 오래된 여관에 비해 깔끔한 시설인 이유도 있지만, 외국인노동자들이 머무는 숙소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이유도 있다고 했다. 나는 절뚝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한 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리가 조금 불편하신가 봐요? 


  관절염이 있어서 무릎이 안 좋아요.


  저희 숙소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어쩌죠.


  괜찮아요. 이 층까지는 별문제 없어요.


  무릎이 그래서 배추 작업은 어떻게 하세요?


  나야, 뭐, 사람들만 실어 나르지, 일은 안 하니까…….


  한 씨는 환갑 언저리로 보이는 장년층 여성이었다. 하지만 말을 안 하고 있으면 험상궂어 보이는 인상 때문에 세상 물정에 훤한, 낡은 남자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상과는 다르게 엷은 웃음을 지으며 서글서글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며 내심 마음이 놓였다. 나의 안내로 방을 둘러본 한 씨는 만족스러워하며 열흘간의 숙박료를 현금으로 계산했다.


  작업이 언제 끝날지 몰라서, 작업이 늦어지면 그때 또 계산하도록 합시다.


  숙박료 지급을 위해 꺼냈던 현금 뭉치를 손잡이만 달린 핸드백으로 다시 넣는 걸 보면서, 요즘도 현금을 저렇게 많이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좀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숙소 이용객들은 일반적으로 인터넷 플랫폼으로 미리 결제하거나 현장에서 카드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몇 해 전부터 초여름이 되면 게스트하우스로 배추작업반들이 찾아왔다. 주로 배추밭을 통째로 거래한 사장이나 작업반장들이 숙소를 이용했다. 이들은 제법 많은 액수의 현금을 들고 다녔다. 배추 작업의 모든 거래가 현금으로 거래된다는 걸 숙소 이용객들을 통해 들었기 때문에 알고는 있었다. 나의 게스트하우스는 동네의 허름한 여관보다 하루 숙박료가 만 원이 더 비쌌지만, 이들에게 그런 돈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초여름 보름간 작업으로 공무원의 한 해 봉급에 해당하는 수익을 현금으로 벌어들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방값을 깎거나 내지 않는 때는 없었다. 어떨 땐 내가 숙소를 비운 사이 급히 이동하느라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때도 있었는데, 방값을 떼어먹고 가는 사람은 없었다.     


  한 씨는 다음날 숙소로 온 중년의 남자를 김 씨라고 불렀다. 김 씨는 동행인 동남아 여자를 투이라고 불렀다. 내가 첫인상을 보고 필리핀 여자라고 생각을 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베트남 사람이었다. 김 씨가 방값을 계산한 뒤 벤츠를 몰고 나갔을 때 뒤늦게 외출 준비를 하고 나온 한 씨는 내게 두 사람이 연인관계라고 일러주었다.


  그럼 남자분은 아내가 있는데, 저러는 거예요?


  한 씨가 연인관계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바람에 나는 ‘네에…….’하고 대답할 뻔했다. 한 박자 늦게 당황한 나는 당황했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내가 있는 사람이 바람피우는 거네요’와 같은 내용의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어, 그게……, 김 씨는 이혼했어.


  한 씨는 내 눈치를 보더니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그럼 왜 결혼은 안 하고……?


  나는 물음을 멈추려고 했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계속 꼬리를 물며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나이가 김 씨는 58세, 투이는 28세인데, 결혼이 되겠수.


  한 씨는 남의 신상과 사생활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고는 연신 생글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결혼하면 여자들이 다 도망가요. 보통은 국적만 취득하고 나면 결국엔 자기 나라 사람이랑 눈 맞아서 튀어버리까……, 쯧. 투이 같은 애들, 이런 일 하는 반장이나 사장들이 하나씩 다 데리고 있어요. 애인 없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아요. 여자들 데리고 있으니 남자들이 돈을 못 모으는 거예요. 저렇게 외제 차 끌고 다녀도 다 빛 좋은 개살구지……, 배추 사업하는 사람들 돈을 많이 벌어도 여자에다 도박까지 하는 바람에 그해 번 돈을 모두 날리는 사람들도 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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