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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맹 Dec 19. 2024

부모님의 첫 콘서트가 라스트 콘서트가 되지 않도록

지난주 일요일 저녁 6시부터 가족 카톡방이 울리기 시작했다. '백화점에서 밥을 먹는데 다들 나훈아 콘서트 목걸이를 메고 있더라', '벡스코 앞에 왔는데 사람들이 엄청 많다', '이제 들어와서 줄 서있다' 등등. 서울에서 부모님의 첫 콘서트 나들이를 지켜보고 있기란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듯한 감정이었다. '옷은 따뜻하게 입었어요?', '방석은 챙기셨고요?', '티켓은 목걸이만 있으면 된대요?' 등등. 사실 그곳에서 50대의 우리 부모님 나이 정도면 꽤 젊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옆에서 챙겨주지 못하는 자식의 마음은 항상 죄송하다. 부디, 첫 콘서트가 라스트 콘서트가 되지 않게 재밌게 즐기다 나오셨으면···. 그렇게 밤 11시까지 생각이 날 때마다 카톡방을 들여다보았다.




유년시절부터 부모님은 내게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관심이 없었다기보다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았다는 쪽에 가까웠다. 유리멘탈인 딸이 스트레스받기보단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길 바라셨다. 대신 하고 싶은 공부가 생기면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 덕에 나는 꿈 많은 사람으로 자랐다. 그랬던 내가 24살에 불쑥, 정말 불쑥 서울로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취업이 된 것도 아니었고 뚜렷한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다는 딸의 고집을 부모님은 꺾지 못하셨다.


처음에 부모님은 내가 못 버티고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고 했다. 워낙 가족과의 시간을 좋아했고 부모님의 품을 떠나본 적도 없었으니, 제 풀에 지쳐 돌아오면 언제든 안아주겠다는 넓은 마음으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꿈을 찾아 떠난 딸이 돌연 26살에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할 줄 누가 알았겠나. 그렇게 나는 본가로 돌아오지 못한 채 서울에서 터를 잡게 되었다. 꿈을 이루기는커녕 가진 것도 별로 없던 때였다. 어안이 벙벙한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다.


결혼생활 또한 순탄치 못했다. 성향이 다른 시댁식구들과 종종 부딪쳤고, 곧이어 남편이 아프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모든 게 버거워져 부모님께 이혼을 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부모님은 모든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셨지만 내 선택에 따른 책임만은 회피하지 않길 바라셨다. 대신 그 책임이란 이름이 무거워질 때마다 기꺼이 발 벗고 나서서 내 앞에 놓인 짐을 나눠 들어주셨다. 주변에 결혼한 지인이 아무도 없던 그 시절, 결혼선배인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결혼 8년 차가 되니 내 삶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다행히 이혼도 하지 않았고 시댁과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 애틋한 관계가 되었다. 그제야 뒤를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그때 믿을 수 없는 사실 하나가 내 마음에 콕 박혔다. 내년에 엄마가 60대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아빠가 2살 연하라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찍 결혼을 한 만큼 손주도 빨리 보여드리고 효도도 하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버렸다.


원래 나훈아 콘서트 티켓의 주인은 시어머니였다. 아가씨가 본인 엄마에게 효도를 하려고 예매해 둔 티켓이었다. 시어머니는 오래된 임영웅의 팬이다. 얼마 전, 운 좋게도 친구의 도움으로 임영웅 콘서트 티켓팅에 성공을 했다. 시어머니가 임영웅 콘서트만 가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나훈아 콘서트 티켓은 주인을 잃게 되었다. 아빠는 허리도 좋지 않고 어디 오래 앉아있는 걸 본 적도 없어서 콘서트를 권할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나훈아 콘서트 티켓이 생겼다고 말하니 아이처럼 기뻐하셨다.


엄마의 말로는 그날부터 아빠가 소파에만 앉으면 나훈아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어느 날은 카톡 프로필 사진이 콘서트 티켓으로 바뀌어있었다. 이렇게나 좋아하실 알았다면 진작 콘서트 보내드릴걸. 모두 똑같은 시간이 흐르는 속에 살고 있지만 부모의 시간은 자식의 시간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같다. 공연장에 입장하기 부모님이 셀카를 찍어 보내왔다. 이렇게 얼굴이 가까이서 보이는 셀카는 오랜만이었다. 엄마도 엄마지만 부쩍 나이가 아빠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만나온 모든 아빠들을 통틀어 우리 아빠처럼 키도 크고, 비율도 좋고, 옷도 잘 입고, 멋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는데···. 내 결혼식 때 아빠와 입장하는 장면을 친구가 SNS에 올렸는데, 그 뒷모습을 보고 모두가 '남편이 훤칠하다'며 칭찬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의 의문의 1패) 예전에도 아빠와 함께 등산을 갔다가 부부로 의심을 받은 적도 있었다. (나의 의문의 1패) 그래서인지 사진 속 아빠의 모습이 유난히 낯설어 보였다.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 카톡방은 울리지 않았다. 밤 11시가 지날 무렵 지하철에 오른 부모님에게 드디어 연락이 왔다. '딸 덕분에 신세계를 경험했다', '울고 웃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등등.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벡스코에서 집까지 1시간이 넘는 꽤 먼 거리임에도 이까짓 거리는 일도 아니라며, 여전히 들떠있는 부모님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다음날에도 아침부터 전화를 거시고는 어제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해주셨다. 마치 나훈아란 인물의 영웅담을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나훈아가 라스트 콘서트를 하든 말든 아무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 같은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나니 그분의 은퇴가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2025년에 콘서트를 한다는 가수들의 이름을 불러주었지만 나훈아만큼 부모님의 구미를 당기게 만드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덕질, 콘서트 이런데 관심은 없지만 앞으로는 공부를 조금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첫 콘서트가 라스트 콘서트가 되지 않기 바라며.


2024. 05. 나의 버팀목 나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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