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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연 Apr 05. 2024

08. 무너지지 않으려면

워킹맘의 숨 쉴 시간, 달리기

2010년까지 세계 최고층 빌딩이었던 대만의 '타이베이 101'에는 특별한 점이 있다. 통상 초고층 빌딩에는 지진과 강풍으로 인한 흔들림을 최소화하기 위해 건물 깊숙이 무거운 구조물을 설치하는데 이를 윈드 댐퍼(wind damper)라고 한다.


타이베이 101은 애초에 공개를 염두에 두고 외관까지도 아름답게 설계하여 관람객들은 직경 5.5미터, 무게 660톤의 황금색 구체를 실제로 볼 수 있다. 이 윈드 댐퍼는 풍하중으로 발생하는 빌딩의 흔들림을 40% 이상 줄여준다. 실제로 2015년 대형 태풍에도 윈드 댐퍼가 있어 빌딩을 지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 겨울 대만 여행을 갔다가 이 윈드 댐퍼를 보고 운동이, 달리기가 내 삶에서 차지하는 모양을 실제로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김혜남 작가가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에서 마흔에는 마음에 지진이 일어난다고 했다. 나도 그즈음 지진을 겪었다. 보통 40대가 되면 윗세대와 아랫세대를 모두 돌보는 부담이 늘어나고, 노화는 진행되어 안팎으로 삶의 무게감에 짓눌리게 된다. 그때 무엇이 지지대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나는 첫째 임신기간 중 임신성 당뇨와 갑상선 기능 저하 진단을 받는 바람에 출산 후에도 정기적으로 대학병원 내분비 내과 검진을 다녔다. 당시 교수님은 살이 찌면 언제든지 2형 당뇨로 이환될 수 있으니, 몸무게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바짝 기합이 들어 절제된 식단, 꾸준한 운동으로 10년간 몸무게 52kg 근방을 사수했다. 당류는 철저히 제한하였고 헬스클럽, 필라테스 등 집과 회사 근처 운동시설을 다양하게 이용하였다.


문제는 갑상선기능저하인 경우 적게 먹어도 살이 잘찌고 쉽게 지친다는 거였다. 운동을 하고 탄수화물을 절제하면서도, 피곤하거나 영양이 부족해서는 안되는, 병리적으로 미묘한 균형이 필요한 상태를 10년을 끌어왔으니 제법 잘해오긴 했다.


하지만 10년은 강산도 바뀐다는 기간이었다. 똑같이 먹어도 전과 같지 않은 육체에 점차 서글픔을 느꼈고, 먹는 즐거움이 제거된 삶을 지속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갑상선 기능 저하 약, 신지로이드는 매일 한알씩 먹었는데 0.05로 시작해서 0.1까지 증량됐다. 부작용은 전혀 없는 약이라지만 이러다 갑상선이 더 나빠지면 어쩌나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회사에서는 직급이 올라가며 비중 있는 업무를 맡게 되었고 스트레스도 비례해 증가하였다. 자주 단 음식이 당겼고 먹는 양도 늘었다. 그 와중에 코로나 사태까지 터지며 실내체육시설이 문을 닫는 바람에 그나마 삶의 낙이 되어 주던 필라테스까지 할 수 없게 되었다. ‘아직 어린 아이가 둘이나 있는데. 내가 병이 들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자주 울컥했다. 지금에 와서 보니 지진과 태풍의 습격을 받고 휘청거렸던 빌딩과도 같았다.      


그때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뭐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신묘한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이끌려 2021년 1월 그 한겨울에 러닝을 시작하게 되었다. 운동 신경이 없어도, 시간이 없어도 언제든지 실외에서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그런 운동을 여기저기 검색했었나 보다. 출근길에 핸드폰에 떠오른 어느 러닝 유튜버의 채널을 보고 이거다 싶어 집 앞 한강에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청량한 겨울 공기 속을 달리다 보면 그 투명하고도 차가운 느낌에 내 속에 올라왔던 그 무엇이 쑥 내려가는 듯했다. 달리는 나의 신체에 집중하고 있노라면 내가 명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내 삶을 끌어내리는 중력에서 잠깐 벗어나는 느낌이었다. 세 달 정도를 꾸준히 달렸더니, 숨통이 트였는지 점차 디저트를 먹는 빈도가 줄었다. 대체로 기분이 괜찮았고, 혈당과 갑상선 수치도 정상범위에서 유지되었다. 그렇게 매서운 40대의 첫겨울을 무사히 보냈다. 봄이 온 것이었다.

    



실상 생애전환기에 팬데믹이라는 사회적 재난을 당해 절박함에 달리기를 시작했으니, 다시 실내 체육시설이 문을 열었으면 달리기를 그만둘 법도 한데 나는 이제 4년 차 러너가 되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2년쯤 지나서는 대학병원에서 지역 내과로 옮기라고 의뢰서를 써주었다. 10년 넘게 수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으니 이제 그만 하산하라는 뜻이었다. 개인병원에서도 6개월마다 한 번씩 혈당과 갑상선 검사를 했지만 걸리는 시간도 짧았고 심적인 부담도 덜했다.


그뿐 아니라 그동안의 경험상 우울감과 분노 해소에도 도움이 되는 느낌이 있었다. 그게 단순히 내 생각이 아니라 데이터로 입증되는 과학이라는 걸 최근에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유산소 운동은 외부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길러주고 뇌의 균형을 바로잡을 뿐만 아니라 뇌기능을 최적화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유산소 운동을 해야 한다.” <운동화 신은 뇌, 존 레이티·에릭 헤이거먼>   

  

이 책에서 월경전증후군에 미치는 운동의 영향을 유산소 운동과 근육 운동을 하는 집단으로 나누어 평가하였는데, 신체적인 증상은 양 집단 모두에서 개선되었으나,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달리기를 한 여성들이 훨씬 좋은 결과를 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늘어나는 책임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데 그때 비단 달리기뿐 아니라 어떤 운동이든 삶의 지지대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만 정신적인 운동에 속하는 달리기는 정신과 육체를 보다 균형 있게 지켜줄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어디에 있든 이제 다른 이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어야 하는 시점에서 달리기가 삶의 균형추 역할을 해준다는 말이 위로가 되었다. 내 몸과 마음을 관리할 수 있어야 다른 이를 돌보고 끌어주는 일도 가능할 거다.


이제 달리기는 내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으니 윈드 댐퍼가 든든하게 자리한 셈이다. 앞으로 지진과 태풍이 없기를 바라겠지만, 맞닥뜨리더라도 휘청거릴지언정 무너지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믿고 달리기 생활을 이어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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