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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 Apr 23. 2024

영화 《인 더 하우스》 리뷰

이야기와 관음증적 욕구


 뭐랄까, 내가 본 것 중 가장 문학적인 영화였다.
영화는 학생들이 왔다 갔다 교내를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준 후, 교복 입은 학생들의 얼굴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토록 많은 개인들의 수만큼 각자가 가진 서사도 다양하며, 만들 수 있는 이야기도 무궁무진하다는 의미일까? 그야말로 문학을 다룬 영화의 문학적인 스타트가 아닐까 싶다.


 영화는 표면적인 내용에서 살짝만 인물의 심리를 함께 생각하며 보아도 여러 가지 것들이 보인다.
우선 라파의 어머니 에스더는 집에 있는 시간이 제일 길지만 그 집의 인테리어를 바꾸고 싶어 한다. 결혼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을 이때부터 짐작할 수 있다. 혹은 처음 가르시아가 라파의 아버지를 묘사할 때 그를 약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측면이 있다. 가르시아에게 그런 아버지를 제치고 에스더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비치는데, 묘하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느낌이 있다.


 주인공 클로드 가르시아는 어머니가 없으며 가정형편이 좋지 못하다. 그래서인지 모성애와 가족애에 대한 결핍이 있다. 그 결핍 때문에 완벽해 보이는 중산층 가정인 라파 가족을 훔쳐보며 그 속에 침투하고 싶어 하는 은밀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소설로 쓰는데 소설에서 일어나는 일이 현실인지 소설인지 점점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영화 《인 더 하우스》의 중요한 논점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술과 외설의 경계"이다. 선생님의 아내는 갤러리를 운영하는데, 거기에 전시하는 예술이라는 것이 성인용품을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가르시아가 쓰는 소설은 과연 예술인가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한 외설인가? 영화는 이에서 더 나아가 예술과 도덕성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선생님은 소설의 계속 보고 싶은 욕구 때문에 수학 시험지를 빼돌리는 비리까지 저지르게 된다.(라파의 수학 성적이 떨어지면 가르시아의 소설을 읽지 못하게 된다) 그 외에도 유부녀를 욕망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며 소설을 쓴다는 것이 질책을 받아야 할 것인가 예술로만 바라봐야 될 것인가?라는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한다.


 가르시아의 문학 선생님은 가르시아가 쓰는 이 소설에 알지 못할 매력을 느끼고 일종의 관음증적 욕구를 느낀다. 학생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자꾸만 소설을 원한다. 아내와 함께 영화관에 가서 소설이 흥미진진하다고 말하며 극장 좌석에 앉아 팝콘을 먹는 선생님의 모습이 나오는 씬은 그가 가르시아의 소설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모습과 맞닿아 있다. 결국 선생이나 관객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영화도 관음증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면모가 있다. 어두운 극장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 남의 이야기를 훔쳐보는 것. 어쩐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이창》이 떠오르기도 한다. 가르시아 왈 "(선생님이) 재능이 없어서 분노하는 것 같다." 선생님은 책을 쓴 적도 있지만 자신 스스로도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인정한다. 반면 가르시아는 문학에 재능이 있다. 선생님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가르시아를 통해 실현시키며 대리 만족한다. 이 또한 관음증적 욕구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영화의 중 후반쯤에 가면 소설의 내용으로 전개되는 씬에 선생도 개입하기 시작. 선생님의 아내가 라파 부모님들한테 갤러리의 초대장을 보냄으로써 소설에 또 개입하며,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가르시아가 선생의 아내에게 접근하기도 한다. 가르시아의 "소설"과 영화 속 현실이 경계 없이 넘나드는 것이 신박했다.


 에스더에게 함께 도망치자고 한 가르시아. 에스더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그 후 처음으로 가르이사의 집과 아버지가 나온다. 몸이 불구가 된 아버지를 돌보는 가르시아. 사실은 가정으로부터 그리고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은 가르시아가 아니었을까. 가르시아는 이러한 욕망을 에스더에게 투영해서 보았을 뿐. 혹은 가정에 헌신하며 자신의 삶과 욕구에는 충실하지 못한 에스더의 모습을 보며 묘한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과 맞물리는 지점이 있다. 과잉 해석을 하자면 일종의 변칙적 수미상관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가르시아와 선생님이 함께 바라보는 아파트의 창문을 통해 창문의 개수만큼이나 다양한 개인들의 인생사와 "이야기"가 비친다. 이렇듯 《인 더 하우스》는 무수한 서사와 그를 엿보고픈 관음증적 욕구가 이리저리 뒤섞여 탄생한 매력적이고 문학적인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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