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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Mar 12. 2024

엇갈려 버린 밸런타인데이 시그널

미안하고 후회되는 밸런타인데이의 기억

우리 부부는 6개월이 채 안 되는 짧은 연애기간 후, 무더웠던 6 하순 어느 날 결혼을 했다.

서로를 점점 더 알아가는 신혼 생활이 이어지며 그해 9월이 되었다. 아내가 자기 생일선물로 뭘 사줄지 물어봤다. 잠시 당황했다. 9월에 아내 생일이 있다는 걸 잊었을 뿐 아니라, 케이크를 사고 근사한 곳에서 외식이나 하면 될 일이지 선물까지 사준다는 건 왠지 내키지 않았고  생소했다. 내가 그런 가정 분위기에서 자라지 않아서인 것 같았다

아내는 세 자매 중에 맏딸이었고 딸들이 많아 생일을 서로 챙기는 아기자기했던 집안 분위기였던 반면, 나는 이와 반대로 삼 형제 중 막내였고 아들들만 있어서 그런지 서로 생일 선물을 주고받으며 챙기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내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원하는 선물을 사줬다.      

그해 12월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나는 추워도 답답해서  목부위를 감싸는  목티 같은 옷은 입지 않는데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두꺼운 털실로 목부위를 두툼하게 짠 누런색 스웨터를 사주었다. 맘에 들진 않았지만 그 옷을 자주 입어야 했다. 반면에 나는 아내가 사고 싶어 하는 옷을 선물로 사줬다.

나는 내 선물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는 점과 선물 간 가격차가 많아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이듬해 214일 날이었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출근길에 올랐다. 나의 출근길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섬이라서 배를 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선착장까지  승용차로 가서 20~30분마다 한 번씩 다니는 배를 타야 하는데 여객선이 아니고 철부선이라 정해진 시간과는 관계없이 배에 차량이 다 차면 바로 출발했기에 그날 운에  따라 배를 기다리는 시간이 들쑥날쑥했다. 20분 정도 배로 이동 후  섬에 내린 다음 다시 버스로 10분 정도 가야 했다.  그날은 하늘이 아주 맑았다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가 서로 자기의 색채를 뽐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람은 아주 차갑고 매섭게 불었다. 직장은 바닷가라 그런지  집에서 나설 때보다 훨씬  추웠다. 사무실 안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직장 앞에 와있다고 했다. 깜짝 놀랐다. 아침에 이곳에 온다는 말도 없었고, 교통이 불편한 이곳까지 뜬금없이 왔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 하고 급한 마음에 밖에 나가보니 아내는 청치마에 청자켓,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목에는 실크 스카프를  둘러 한껏  멋을 부리고 왔고  손에는 큰 초콜릿바구니가  들려있었다. 그런데 추운 날씨에 따뜻한 봄에나 어울리는 옷을 입고 왔기 때문에 많이 추워하며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제야 오늘이 밸런타인데이인 줄 알았지만, 이날을 상술로 보는 나는 초콜릿을 받는 것에 아무런 의미나 감흥도 없었고 돈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왜 이런 것을 이렇게 추운 날 옷도 얇게 입고 이곳까지 고생하며 가지고 왔냐며 핀잔을 줬다. 무색하게 내미는 초콜릿 바구니를 건네받았지만 어떤 고마움도 감격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리곤 추위에 움츠린 모습이 안쓰러워 빨리 집에 가서 쉬라고 택시를 태워 돌려보냈다.      

아내가 돌아간 후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기대하면서 옷도 예쁘게 입고 바쁜 시간 쪼개어 여기까지 배 타고 버스 타고 힘들게 왔을 텐데 고맙다는 말은커녕 핀잔만 들었으니 기분이 많이 나빴을 것 같았다.      


퇴근 후 집에 들어갔다. 그날 아침 바닷가 찬바람보다 더 냉랭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반가워하지 못해 미안하다’. ‘너무 추워 보여서 마음이 안 좋아서 그랬다’, ‘초콜릿을 직장 동료들과 잘 먹었다’. ‘고맙다등 이런저런 말로 마음을 풀어주려 했지만 상하고 닫힌 마음을 좀처럼 열려고 않았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처럼 후회되는 밸런타인데이의 상처도 점점 아물어 갔고 기억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런데 314일 화이트데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상술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지만 지난  밸런타인데이의 서운함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선 사탕을 사야 했다. 제과점에서 제일 크고 비싼 사탕바구니를 샀다. 그리고 화이트데이 아침 출근하는 아내에게 슬며시 내밀었다. 그런데 받지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주인 잃고 갈 곳 없어 덩그러니 테이블에 놓인 사탕바구니를, 거실 장식장 가운데 넣어두었지만,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하고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렸다.  사탕바구니가 쓰레기통에 버려지면서  밸런타인데이, 화이트데이라는 이벤트도 우리 가정에서 영원히 버려졌다.      


아내가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나에게 준 것은 관심과 사랑의 시그널이었는데, 나는 현실적인 가치와 상황만 보느라 이면에 감춰진 아내의 시그널을 알지 채지 못한 것 같다.  개와 고양이가 친해질 수 없는 이유가 개는 상대가 좋을 때 시그널이 꼬리를 올리는 것인데 고양이는 그 반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부부도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의 시그널이 엇갈렸던 것 같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겉으로 드러난 아내의 말이나 행동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아내의 행동에는 가끔씩 이면적 시그널이 있다는 것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내가 알아채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시그널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아내가 보내는 이면적 시그널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서 알아내고  맞춰줘야 하는 건지, 그냥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시그널을 존중해야 하는 건지, 알듯 말 듯 하면서도 쉽게 답이 안 나오는 수수께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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