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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론 비가 오는 밤이다. 우산살보다 굵은 빗살이 떨어지는.
언니는 잠이 오는 나를 몇 번이고 치켜 업는다.
어린 어깨와 더 어린 어깨엔 부러진 우산살을 타고 내리는 것들이 까맣게 젖어든다.
잠도 비도 빈 버스도, 기다리지 않는 것들은 자꾸 오는데 엄마는 오지 않는다.
자면 안 된다는데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가로등이 점멸한다.
언니의 등이 축축이 젖어온다.
이미 젖어오는 게 익숙해진 것들은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습기에 젖어 정류장을 서성인다.
시간이 간다. 찰박거리는 거리엔 가득 차서 불필요한 것들이 나뒹군다. 잠이 온다.
오가는 시선, 멀어지는 숨소리와 더 이상 차갑지 않은 어깨가 있다.
자면 안 돼. 저기 엄마 온다. 자니.
목감기예요. 한 며칠 열이 날지도 모르겠어요. 심한가요. 괜찮을 거예요.
칭얼대는 아이의 손을 잡고 병원을 나온다. 이제 막 빗물이 떨어지는 거리엔 우산은 없고
느리게 달리는 자동차와 느리게 걷는 아이와 느리게 걸어야 하는 내가 있다.
빗방울은 굵어지는데 달리는 자동차들을 보내느라 우리는 한참을 서 있다.
업어줄까. 응.
배는 뭉치고 아이는 무겁다. 그래도 아이는 아직 잠이 오진 않나 보다.
잠이 오는 숨소리는 더없이 무거운 법. 부여잡은 손목이 아파도 놓을 수 없다.
나는 이제야 놓을 수 없는 무언가를 업고서 그때의 언니가 놓을 수 없었던 무게를 짐작한다.
그저 짐작만 한다. 더는 해줄 것이 없는 시간에 있다
그때 언니와 내가 기다리던 버스가 11번이었는지, 아니면 28번이었는지.
그런 것들이 희미해질 만큼 나는 지금 아주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그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그 밤, 그토록 기다리던 엄마는 어떤 이유로 늦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와야 했는지,
그때 우리를 먹여 살린 생계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엄마의 어깨에 놓여있었는지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나보다 겨우 몇 살 많은 언니가 나를 업고 서성이던 그 거리의 풍경들과
자주 칭얼대던 나의 손을 잡거나 업는 방식으로 언니가 엄마를 기다렸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내가 본 적 없는 것들을 상상하기도 한다.
내 손을 꼭 잡고 버스를 기다리던 어린 언니의 뒷모습. 버스에서 내린 엄마가 잠든 나를 받아 업고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던 그런 뒷모습 같은 것을 말이다.
그녀가 선택했거나 그저 주어졌거나.
그녀와 그녀의 어린 딸이 나와 함께 지나온 그 시기는 어떻게 생각해 봐도 나에게는 슬픔이다.
안타까움이고 미안함이고 또한 고마움이다.
그때로 돌아가 그 시절 그녀들이 주었던 것들을
내가 그대로 되돌려 줄 수 없다면 그건 어떤 식으로도 갚을 수 없는 것이다.
생은 그렇게 셈을 치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야, 나는 인생의 놓을 수 없는 무게를 짐작하는 어른이 되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어느 한 생을 통과한 것들이 공유하는 짐작이란 얼마나 신랄한 것인지.
고스란히 살아남아 때때로 선명해지는 핑 도는 향기 같은 것.
다만 그럴 수 있다면, 나는 비 오던 그 밤 언니의 등에 업혀있던 때로 돌아가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어린 그녀의 등에 기대, 엄마는 올 거라고.
이제 비도 그치고, 그리고 우리는 무사할 거라고.
만약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