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언어가 나를 아프게 하거나
매혹시키기 때문에 관심이 있다.
하나의 이야기에서
내가 음미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그 내용이나 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 아름다운 겉봉투 위에
입힌 상처이다.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중에서-
+
스무 살 무렵 보았던 나무가 있다.
내가 그 무렵에 보았던 나무는 한두 그루가 아니었겠지만, 반드시 보아야 했던 나무는 그 한 그루였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계단이 많아서 필연적으로 동네의 맨 꼭대기에 위치해야 했던 그 집에 있던 나무는 감나무지만 접목을 하지 않아 감이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잎이 저렇게 큰 거라고. 감이 열리지 않는 감나무라니.
공교롭게도 동네의 맨 꼭대기에 있던 그 감나무집 바로 아랫집이 우리 집이었다.
공교로운 것과 필연적인 개연이 만나 얇은 슬레이트 지붕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비나 바람 따위를 공유하는 구조.
나는 그곳에서 스무 살 무렵의 몇 해를 살았다. 창을 열어도 벽이 보이는 원초적 부조리 앞에서 벽 뒤의 벽과 창 뒤의 벽 중 어떤 것이 더 참을 수 없는 것인지. 감나무이지만 감이 열리지 않는 저 나무의 사연은 평범한 서사인지 상실인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곤 했다. 도무지 그런 생각들은 결론이 없었고, 결론은 없었지만 유용했다.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그 시절의 신파같은 자기연민은 항상 철없는 아버지의 빚보증이나 사기로 시작해서 창을 열어도 벽인 그 집으로 점철되곤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딱 두 계절을 살 집으로 이 집을 고르면서, 그래도 감나무가 있더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런 말은 우리 가족 중에 엄마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근처 누군가에 의해서 자주 벼랑 끝에 몰려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잠시 짬을 내어 끊어보는 롱테이크. 책임져야 할 것들을 어설프게라도 파악하고 있는 사람만이 찍을 수 있는 희미한 쉼표 같은 것.
두 계절이 몇 해가 되도록 창을 열어도 벽만 보이는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우리는 우리가 지쳐가는 것인지 이 상황에 적절히 적응되어 가는 것인지 점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삶이 원한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지치든 적응을 하든 그런 것 따위를 지켜보기엔 삶은 터무니없이 거대하고 무관심했다. 딱 두 계절이라면 참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상황들은 웬걸, 도무지 몇 년을 안 참을 도리가 없었다. 참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 별로 없었던 것들 사이에 그 감나무가 있었다.
늦은 밤, 게다가 비도 오는 그렇고 그런 밤.
동네 초입 슈퍼집에서 술이 떡이 되어 쓰러진 아버지를 데려가라며 걸려오는 전화가 엄마에게는 깜빡 잊고 온 짐을 찾아가라는 전화만큼이나 자연스러워지던 그 여름. 감을 달 수 없어 잎이 커버린 감나무 아래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다시 얇은 슬레이트 지붕 위로 떨어지며 세계가 순환하던 그 여름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더 아래로. 그리고 그 위와 아래가 서로 부둥켜안고 고함이 되고 주정이 되고, 노래나 눈물이 되던 밤.
나는 빗방울이 그 커다란 감나무 잎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창을 열면 벽이 보이고 고개를 살짝 비틀어 올려다보면 그 슬레이트 지붕 옆으로 다 자란 감잎들이 보였다. 이미 말했지만 그런 것을 잠자코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나는 묻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지금, 빗방울이란 것이 저런 모습으로 저 감잎 위로 떨어지는 것이 옳은 거냐고.
노랗게 빛나다가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가로등이 옆에 있었었나. 나는 어두워지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던 것 같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감나무가 있더라고. 했던 엄마의 말은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철학적이게도 사실이었다. 그 밤,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다시 아래의 아래에 고이던 제법 가락이 있던 신파와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그 공간을 채우던 낮은 기압의 고요 속에서 적지 않은 비를 받아내며 서 있던 감나무와 그 감잎들의 서사는 부조리하게도 지금껏 내가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