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은중일까, 상연일까
내가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모든 이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그 사정을 드라마를 통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인생이든 각자의 사연이 있고 드라마 속 인물의 인생을 내 삶처럼 엿보며 나 자신의 시간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은중과 상연> 역시 내 과거를 되돌아보게 만든 작품이었다.
배우 김고은의 작품이라면 모두 챙겨보았던 나로서는 당연하게도 이 드라마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자마자 저장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바로 보지는 않았다. 예고편만 봤을 때는 영화일 거라 생각해서 내용이 장편으로 이어질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여자들의 흔한 이야기’일 거라는 약간의 편견이 있었다.
평소의 나라면 재미와 상관없이 무작정 재생 버튼을 눌렀을 텐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다른 프로그램을 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꽤 오랜 후에야 조심스레 1화를 눌렀다. 그리고 결국, 나는 단숨에 9회까지 몰아보았다.
이틀 만에 전편을 보면서 울고 웃으며, 나는 또다시 김고은이라는 배우에게 몰입하고 말았다.
‘은중’의 입장에서 나도 ‘상연’이와 같은 친구를 20대에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친구와는 10년쯤 전부터 연락하지 않는다.
꽃 같던 20대의 한 시절, 10년 넘게 엮였던 그 관계는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래도 그때의 상처와 혼란이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드라마를 보며 그 친구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예전에는 내 인생 이야기를 하며 “넌 정말 소설 속 주인공 같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그 시절에 내가 그 친구 때문에 겪었던 일들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절교까지 하면서 끊어냈고 그와 함께 알던 모든 인간관계를 정리하게 되었던 그 시절, 그 사건은 극 중 은중처럼 나도 그랬다. 지금은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지만 그땐 그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사소한 말에 상처받기도 했고, 이해받지 못했다고 느끼며 미성숙한 감정에 휩쓸려 많은 것을 잃었던 시절이었다.
내가 겪은 일이 ‘은중과 상연’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의 이야기는 드라마처럼 미화될 만한 소재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내 이야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면 그 친구는 사회적으로 매장당해야 할 정도로 내게 잘못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은중과 상연’보다는 막장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거다.
그 친구도 그 입장에서는 사정이야 있었겠지만, 내가 상처받았던 그 일에서는 명백하게 그 친구가 나의 사람을 빼앗았고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시기 질투로 없는 거짓까지 만들어내면서 내 인간관계를 정리하게 했으며 오래 사귀었던 내 남자 친구와도 결별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이야기는 언젠가 내가 소설이나 시나리오로 써 볼 생각도 있었으니 여기에서는 이쯤만 꺼내보겠다.
어딘가에서 그 친구의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데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하니 권선징악이 정말로 있다면 그 대가는 언젠가는 받을 거라 믿는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별일 아니었던 일들이다. 그저 어렸고, 솔직하지 못했고, 질투가 사랑인 줄 알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극 중 은중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도 내 모습 같았다.
친구란, 이해관계가 엮이지 않을 때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는 관계다.
질투도, 경쟁도, 열등감도 필요 없는 관계일 때 우리는 진짜 친구가 된다. 하지만 일말의 질투와 시기가 섞이면 그건 친구가 아닌 관계가 되는 거다. 그게 과연 친구라 할 수 있을까?
상연이 은중에게 느꼈던 부질없는 감정들. 그건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다. 다만 그런 보잘것없는 감정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절제하고 그 감정을 배척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건, 사람이라면 느끼는 죄책감과 반성이 있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은 교육을 통해 배우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것들을 내 이기심 때문에 끝까지 고집하지는 않게 된다.
상연이 죽음을 앞두고서야 그 감정을 깨닫고 참회하는 모습에서 나는 인간의 연약함과 동시에 용서를 보았다.
〈은중과 상연〉은 세 가지 금기를 다룬다. 성 정체성, 자살, 안락사......
특히 안락사라는 주제는 ‘누군가의 죽음에 내가 관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극 중 은중의 선배가 말한 “다른 사람의 죽음에 관여하는 일, 그건 평생 시달릴 수 있는 일”이라는 대사는 오래 여운이 남았다.
만약 내 가까운 사람이 나에게 안락사를 위해 “같이 가 달라”라고 말한다면 나는 과연 그 옆에 설 수 있을까.
은중의 말처럼 “이렇게 무서울 줄은 몰랐다. 그곳에 가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 가겠다고 말한 후에야 알았다.”라는 대사는 내 마음 깊은 곳을 울렸다.
삶과 죽음을 신중하게 마주하는 그들의 태도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마지막 회에서 은중이 상연의 안락사를 지켜보는 장면은 그 어떤 장면보다 고요했고, 슬펐으며 아름다웠다.
상연은 결국 은중이 했던 말, “누가 널 끝내 받아주겠니?”
그 말의 감옥 속에서 평생을 갇혀 살았던 것 같다. 그 말이 상연의 인생을 지배했고 그 죄책감이 그를 무너뜨렸다.
드라마의 대사들은 한 줄 한 줄이 마음을 울렸다.
“아무리 힘든 일도 언젠가는 끝난다.”
“죄책감은 깊고 집요한 감정이라 어떤 사람은 너무 괴로우면 죄책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대.”
“그냥 당하니까 겪은 거야, 그냥 겪은 거야.”
“답이 없다는 거 알아. 그래도 너의 시간을 같이 겪을게.”
그 말들 속에 삶의 진실이 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은중이자 상연으로 살아간다.
사랑하고, 상처받고, 오해하고, 미워하다가 언젠가 그 모든 감정 위에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존재로 남는다.
〈은중과 상연〉은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다.
그건 우리가 지나온 시간과 아직 끝나지 않은 마음의 이야기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한때 미워했던 그를, 조용히 용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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