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어떻게 받아야 사과 같을까
AI 같은 사과 말고
내가 남편의 성매매로 속상한 얘기를 한두 마디 하게 되면, 남편은 마치 벽인 듯 가만히 있거나 스펀지인 듯 그 말을 그냥 빨아들이고 만다.
내가 사실을 알게된 지 정말 며칠 안 됐을 때, 남편이 있는 대로 기가 죽어 처져서는 입 꾹 닫고 계속 어두운 표정이길래 속이 터져서, 이런 나도 이렇게 웃으려고 하는데 제발 그러고 있지 말라고, 티 내지 말라고 말을 했었다. 남편은 용케도 그 말대로 잘해주었다. 문제는 내 마음과 달리 이제 그걸 너무 잘한다는 거다.
정말 며칠 참다 한 번, "남편은 정말 나빠." 하고 톡을 보내도 답이 없다 다른 얘기, 또 며칠 지나 못 참겠을 때 "남편은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미안해할 줄도 몰라." 해도 묵묵부답.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지?" 하면 "미안해."
그러다가 가끔 한 마디 한다. "미안한 거 아니까 이제 그 얘기 그만하면 안 돼요?" 당연히 안되지. 지금도 3일에 한 번, 5일에 한 번, 아니면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저런 식으로 한두 마디 툭. 내가 200번 괴로우면 한 마디 튀어나오는 건데…….
미안하다고 천만 번쯤 나에게 사과했으면 좋겠다. 얘기 그만했으면 하는 식으로 "미안해?" 물으면 "미안해." 대답하는 AI 같은 미안함 말고. 정말 미안한가 보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그런 사과.
그건 어떻게 하는 거고 어떻게 받는 걸까? 미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미안하다고 말하라고까지 했는데도 듣기 힘든 말이다. 옆구리 몇 번 찔러서 들어도 마음으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버진리버>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거기에 나오는 노부부는 한 동네에서 정말 친한 절친처럼 지내는데, 몇 회를 보다 그 둘이 부부였음을 알았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가 실수로 할머니의 친한 친구와 하룻밤을 보냈다. 접시 하나 떨어뜨려 깨뜨리는 것도 아니고, 그런 행동에 어떻게 실수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게 된 건지 이해도 되지 않지만 아무튼 하룻밤의 실수였다. 그렇게 자유분방한 미국 할머니도 20년 전 할아버지의 단 한 번 실수에 상처받고, 더 이상 결혼 생활을 이어가기 힘들어 별거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할아버지는 수도 없이 사과를 했다, 나름대로는. 내가 겪어보니 그건 그냥 '그 사람 나름대로' 많은 사과인 거다.
할머니는 20년이나 지난 일인 데다 여전히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음에도 마음에 들어오는 사과를 받아본 적도 없고 여전히 너무 아프고 괴롭다. 할아버지는 답답하다. 뭘 더 어떻게 사과해야 마음이 풀리는 건지……. 어느 날 할머니가 그동안 서랍 속에만 간직했던 이혼 서류를 내민다. 이제 벗어나고 싶다고.
동네 다른 예쁜 할머니와 친해진 할아버지는 (예쁜 할머니는 이성적인 감정으로 시작했지만) 그 할머니의 조언을 듣는다.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진심으로.
그동안의 사과와 뭐가 그렇게 달랐는지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할아버지는 다시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리고 할머니가 건넸던 이혼서류에 서명하는 대신, 반지로 프러포즈를 한다. 할머니는 사과와 프러포즈를 받고 행복해한다.
나도 어느 날 갑자기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뒤늦게라도 남편이, 그동안 사과했던 그 마음보다 훨씬 더 큰 깨달음이 필요했던 거라는 걸 알게 될까? 내 마음이 누그러질 사과라는 게 있긴 할까? 사과라는 것. 참 다르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의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