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뭐든 느리다.
밥을 느리게 먹는다. “와. 내가 진짜 느리게 먹는데 넌 좀 심하다.”라는 말도 들어봤다. 조금만 빨리 먹어도 속이 불편해서 함께 먹는 사람의 속도에 맞추다 체한 적이 많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더 먹고 싶어도 수저를 내려놓는다.
걸음걸이가 느리다. 나란히 발맞추고 싶은 마음에 무리하게 걷다 발목이 쑤시기 일쑤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좀 쳐지더라도 뒤에서 혼자 걷는 게 편하다.
임용고시를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외워야 할 게 너무 많았는데 나는 너무 느렸다. 이해도 잘 안 되었다. 이해가 안 되면 그냥 넘어가야 되는데 혹시 이게 시험에 나오진 않을까 그래서 내가 시험에 떨어져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좀처럼 넘어가질 못했다. 경쟁자이자 협력자인 친구들과 비교도 많이 했다. 같은 스터디원 지원처럼 빠르지 못해 괴로웠다. 나는 왜 지원처럼 효율적이지 못할까? 툭하면 엄마한테 달려가, 불안함을 토로했다. 눈물도 많이 흘렸다. 결국엔, 나 스스로를 가두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그리하여 어떠한 비교도, 질투도 할 수 없는 곳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었다.
나는 뭐든 느리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사부작사부작 뭔가를 계속했던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어떤 것도 제대로 된 결과를 만들어내진 못했다. 주 6회씩 했던 근력운동은 아쉽게도 근육량과 정비례하지 않았다. 100편의 글을 썼지만 그 어느 것도 공모전 수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재테크 공부를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야수가 될 수 없는 심장 탓에 좋은 수익률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뭐든 느리지만, 멀리 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밥을 느리게 먹지만,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누구보다 많이 먹을 수 있다. 그리하여 가장 믿는 사람에게는 “천천히 많이 먹을래!”라고 선포하고는 세월아, 네월아 하며 먹는다. 걸음이 느리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나보다 많이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하여 잘 모르는 사람에게 “제가 걷는 걸 좀 많이 좋아해요.. 아니 그거보다 더 많이… 아니 그보다 더…“라고 말하며 조금 수줍어한다. 임용고시 일주일 전까지 과학 각론만 3시간을 부여잡고 있는 나를 보고 지원이 “야, 너 그러다 임용 망하겠다.”라는 폭언을 들을 정도였지만, 나는 꽤나 시험을 잘 봤다. 적어도 우리 과에서 나보다 높은 점수는 없었다. (동점은 있었다. 지원은 아니었다.)
올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운동도, 글쓰기도, 재테크도, 어떤 것도 성취하진 못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제일 오래 먹을 것이고, 제일 멀리 걸을 것이며, 꽤나 잘할 것이다. 근성장에 눈곱만큼도 영향을 안 주겠지만 오늘도 상체 운동을 했다. 당연히 떨어질 공모전을 위해 20번은 수정했을 소설을 또 퇴고했다. 아침부터 파란불을 보이는 종목을 보며 한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지만, 쫄깃한 야수의 심장인 척 추가 매수 버튼을 눌렀다.
물은 100도에서 끓고, 나는 아직 작은 기포조차도 올라오지 않았다.
달콤한 열매를 맛보기 위해선 쓰디쓴 인내를 견뎌야 하고, 나는 꽃도 안 핀 풋내기다.
모든 배움은 계단식으로 이루어지고, 나는 끝나지 않는 평지를 지겹도록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제일 오래, 제일 멀리, 그리고 꽤나 잘 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