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내 보석을 다 날려먹었다 feat. 로아

우씨, 너 T발 C야?

by 낑깡

때는 올해 1월. 야심 찬 새해 계획이라는 핑계로 슬슬 재미를 잃어 가던 오래된 게임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나이가 들수록 뭔가를 시작할 때는 타이밍부터 방법까지 전부 재고 따지고 하는 일이 많아졌는데(심지어 이러다가 시작조차 못하는 때도 많았다), 뭐든 그만두는 건 뭐가 이렇게 쉬운지. 나름 오픈 베타 때부터 접고 하고를 반복했지만 결코 완전히 접진 못했던, 애정하는 게임을 4년 만에 놓아줄 때도 그랬다.


재미없네. 이제 안 할래.



그게 끝이었다. 미련 없이 게임을 끄기 직전에 한 건 딱 하나. 최근 복귀해서 게임을 즐기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내 4년의 정수와도 같은 아이템을 나눠주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4년의 정수였다. 과금을 하며 게임을 즐기지 않았던 나에게는 내 노력의 결실이자, 게임을 즐기는 원동력, 내 캐릭터의 심장, 빛과 소금…. (밈이다.) 아무튼 4년간 나름의 방식대로 게임을 즐기며 모아 온 보석들이었다.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보석'이라는 단어를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보석이란 본디 값지고 비싼 물건이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남자친구에게 내 캐릭터의 모든 걸 뽑아 주고 온 거나 다름없었다. 비록 그 보석의 가치가 객관적으로 엄청나지 않았어도 말이다.


그렇게 한 달이 더 흐른 오늘. 불금을 기념하며 평소보다 조금 긴 통화가 시작됐다.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데 남자친구가 대뜸, 정말 아무렇지 않게 내가 줬던 보석들이 삭제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순간 뭔 소린가 했다. 알고 보니 내가 게임을 접으면서 게임 내 우편으로 내 보석들을 보냈었는데, 남자친구는 혹시 내가 다시 게임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걸 받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던 거였다.


몰랐지. 근데 삭제되더라. 그래서 보석이 다 삭제됐어.



그랬다. 현실에서도 오랫동안 찾으러 오지 않는 분실물을 계속 보관하지 않듯이 게임도 마찬가지였다. 이 정 없는 디지털 쪼가리들은 나와 함께한 4년이고 뭐고 내 보석을 갈가리 찢어 없애 버렸다. 근데 이걸 또 너무 지나가듯 말하니까 기분이 좀 이상하더라.


결국 남자친구에게 미안하다고는 안 하냐고 울컥 화를 냈다. 문제는 내 남자친구는 뼛속까지 TTTTTTT 되신다는 점이었다. 몹시 위험한 경고음을 들은 그의 뇌는 "필요하면 다시 구해줄게."라고 말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뼛가루조차 FFFFFFF인 내 심장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하고 화를 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어떻게 내 4년의 보석을! 하면서 쉬익쉬익 거렸다.




그런데 우습게도 글을 쓰다 보니 언제 울컥했냐는 듯 마음이 가라앉았다. 한술 더 떠서 여기서도 또 인생의 진리를 발견했구나 하고 무릎까지 탁 쳤다.


현실에서도 천문학적인 가격을 가진 보석들은 그 가치도 가치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귀하기 때문에 비싸고 값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게임 속 내 보석도 내게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에 내가 더 울컥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이 보석들은 나만 아는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의 눈에는 내가 보는 것보단 덜 반짝였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은 무척 아쉽지만, 덕분에 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글감이 생긴 게 아닐까.


물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절대 진짜로 화나지 않았다. 절대 진짜 화나서 일기에 써두고 두고두고 우려먹으려고 한 거 아니다. 진짜다.) 전화를 끊긴 했지만, 아쉬움이 한차례 물러가고 나니 그깟 게 뭐 대수인가 싶다.


예상치 못한 나의 텐션 저하에 급격하게 풀이 죽어 있을 나의 T형 남자친구는 내 10년의 희로애락을 담아둔 현실 보석이니까 말이다.


아, 그래도 좀 아깝긴 해. 내 10렙 멸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