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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 May 10. 2020

시험보다는 시도

이르지도 늦지도 않았다. 그때 나는 이직을 했다. 누군가에게는 30대 초반 다른 누군가에게는 30대 중반의 나이. 그 나이로 설명되고 마는 나.

이직이라는 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그 당시 일에 지나치게 매몰된 것을 벗어나 보고 싶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주말 출근은 물론 주중 야근에 때로는 철야까지 강행하던 나. 문득 조직의 구성원이 아니라 '나'의 이름으로 고 싶었다. 그 이름에 아무런 수식어가 없어 초라하더라도 말이다. 이직은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나서야 가능했다.

누군가는  이제 우리 나이에 0.7을 곱해 가늠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나의 나이를 마주하고 다독였다. '10년 후에 나는 분명히 지금의 선택을 곱씹으며 웃을 수 있을 것이,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말이다.' 하고 불안해질 때마다 되뇌었다.

이직 후에도 직장 동료들을 만나기는 쉬웠다. 나는 직장 근처 5분 거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떠난 나를 보는 그들의 마음은 아마도 걱정이었을 것이다. 당시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지켜보는 나의 마음 또한 걱정이었다.

나른한 5월 봄이었. 10년 후에야 웃을 수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5개월 후 공공 도서관 담벼락에 핀  장미꽃 향기를 맡으며 나는 겨르로이 미소 지었다. 마치 돌멩이 하나가 수면 위 동심원을 그리듯 마음에서 서서히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한낮의 한강에서 물고기가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광경에 또 감탄할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있는 30분 동안과 그 맛 사탕을 사려고 여러 편의점을 돌아다니는 시간에도 행복했다. 저녁 무렵 대교의 가로등이 몇 시 몇 분에 켜지는지를 발견하고 숨겨진 보물을 찾은 아이처럼 기뻤다.

행복은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어딘가로 가지 않고 내 곁있었을 것이다. 다만 비로소 그것을 발견하여 느낄 틈이 생겼을 뿐이다.

 여백이 바로 내게 필요한 하나였다는 것이 놀라웠다. 늘 채우려고만 하고 가질 수 없는 것도 가지려 하던 나. 오히려 비우고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내게 행복이란 늦은 밤 라디오를 켜고 침대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빗소리를 듣거나 하는 것이었다. 맞은편 건물의 불빛들이 하나 둘 꺼질 때에도 나는 비밀스럽게 무언가에 빠져 있을 수 있는, 내일이 오늘과 닮았지만 조금쯤은 다를 거라는 가능성을 꿈꿔 보는 것이다.

혹은 그저 림을 향해 농구공을 던져 보는 것, 그 행위의 즐거움으로 충분히 보상을 받기에 득점 여부는 상관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하는 것이다.

이직 후 숱한 곳에 지원서를 쓰면서 나는 공원에서 한가롭게 림을 향해 농구공을 던지는 장면을 생각했다.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낚싯대처럼 드리워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내 예상보다 더 조건이 좋은 곳에서 일하게 되었고 적어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원하던 바대로 잘 자리잡은 것으로 보여졌을 것 같다.

나는 지금 다시 또 다른 림을 향해 던질 농구공을 손에 들고 있다.

언제나 이직 후 정착 시기까지는 다리 위에 있는 느낌이 든다. 나를 지지하는 땅이 줄어드는 대신 가야 할 길이 보다 명확해진다. 그럼에도 처음의 그 막연한 설렘과 용기는 줄어들고 꼭 그만큼 걱정과 두려움이 생기기 마련이다.

허나 강물을 아무리 바라보고 있더라도 발을 담가 보기 전에는 물살의 방향을 알 수 없다. 또한 강의 중심부와 가장자리는 그 방향이 다를 수도 있다.

나는 지금껏 그래 왔듯이 언제나 발을 담그는 쪽을 택할 것이다. 가장자리에 머물러 있지도 않을 것이다. 허우적거리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중심으로 나아갈 것이다. 조금씩 서서히 폭의 문제에서 깊이의 문제로 다가갈 것이다.

"길 없음, 돌아가세요." 따위와 같은 표지판을 보고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지금껏 걸어온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되짚어 보며 성숙해지고 싶다.

삶이란 악보에도 도돌이표는 필요하기 마련이다. 가끔 도돌이표가 너무 많은 것 같다고 해도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마디가 많으면 많을수록 클라이맥스는 더욱 길고 더욱 찬란할 테니까. 하여 나의 시작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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