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리 Aug 09. 2020

산책, 나를 만나러 가는 여행

나는 집순이다. 내 전속 수호천사가 있다면, 그는 나와 함께 퇴근하는 셈이다. 아마 그는 주말이면 늘 연차를 내고 이번엔 어디로 여행 갈까 궁리할 것이다. 혹은 연중 내내 실적 부진에 시달릴 것이다.


워커홀릭 수호천사를 위해 나는 시시하게 다치는 편이다. 가만히 있는 책상에 무릎을 들이댄다든가 맨손으로 설거지하며 그릇을 놓다가 어딘가에 긁힌다든가 하는 식이다. 유일하게 그들이 다소 긴장할 때는 집에만 있던 내가 산책을 할 때다.


한겨울이 아니라면 나는 산책할 때 슬리퍼를 신는다. 슬리퍼는 나를 사랑한다. 구두 속에 마구 구겨 넣었던 나를 부시럭부시럭 끄집어 낸다. 투박한 발톱에 못생긴 발가락도 슬리퍼와 함께라면 당당한 맨발이다. 산책, 나를 만나러 가는 여행 준비 완료다.


나는 주로 한강에 간다. 출근할 때와 달리 최대한 겨르로이 걷는다. 슬리퍼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다. 이렇듯 나는 퇴근한 뒤면 집에 들러 슬리퍼로 갈아 신고 근처 한강에 간다. 한껏 꾸미고 놀러 온 사람들 사이에서 슬리퍼가 한없이 초라해지는 주말에도 한강에 간다. 이직 시기처럼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막연할 때도 간다. 운전 면허 시험에서 내리 3번을 떨어졌을 때도 간다. 내 근심들은 꼬깃꼬깃 접어 바지 뒷주머니에 쿡 찔러 넣고 간다. 그리고 다른 주머니에는 막대 사탕 하나를 챙겨 넣는다.


막대 사탕은 산책 코스의 클라이맥스다. 슬리퍼마저 벗고 앉기 좋은 계단에서 잠자코 막대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문다. 30분 동안 묵묵히 흐르는 물결을 바라본다. 손잡은 딸기와 우유가 내 미뢰에 안녕 인사를 한다. 비로소 잊고 있던 나를 찾은 느낌이다.


아, 맞아. 내가 좋아하는 건 딸기우유맛 사탕이고, 여의주처럼 소중한 이 사탕을 모으기 위해 동네 편의점만 최소 4곳을 돌아다녔지. 나는 이런 열정의 소유자구나. 소도 때려잡게 생겼지만 겁이 많아서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한강의 야경은 아주 드물게 꺼내 보는 아이지.


그렇게 일상 속에 잊힌 나를 기억해 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어쩐지 콧노래가 나온다. 내가 찾은 내가 여전히 그대로라서 안심이 되어서겠지.


6월쯤의 한강은 새벽에 가도 춥지 않다. 낮에 가면 덥다. 아스팔트의 열기에 그런 생각을 해 봤다. 낮 뱉어내는 열기는 몽근 흙으로 된 땅보다 아스팔트가 높다. 왜 그럴까.

나는 굉장히 비과학적이지만 감성적으로 각각의 두께, 즉 표면에서 바닥까지의 깊이가 그 답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아스팔트와 지각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 깊을수록 그것이 품고 삼킬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뜨거운 열기를 쉽사리 뱉어내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그런 것 같다. 진정 무엇을 아끼고 응원한다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마저도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마음의 깊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 내 삶의 이해하기 힘든 점, 그래서 오해받기 쉬운 점이나 조금 아쉬운 점들을 나부터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가 삼키고 품을 수 있겠는가.

울적한 기분을 달래려고 산책할 때 있다. 불합격 원서, 대출 서류 따위로 가방도 내 마음도 여백이 없는 날이다.


연을 날리기에 딱 좋은 바람이 불고 햇볕도 구름 속에서 쉬고 있는 날에 슬리퍼와 막대 사탕을 챙겨 집을 나선다. 내 한숨들을, 많기만 한 생각들을 바람에 또 강물에 띄워 버린다. 그제야 한강에 온 사람들의 안색을 살핀다. 모두 행복해 보여서 문득 기분이 좋아져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막대 사탕을 문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얼마 전에는 한강 공원에잠깐 눈을 감고 걸으며 생각했다. 혹시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상황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자. 기껏해야 걸어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다. 혹 운이 나쁘더라도 불 꺼진 가로등과 부딪히는 일밖에 더 있겠는가? 또한 그 가로등이야말로 어둠을 밝히는 문제 해결책이다. 그러니 더 성큼성큼 용기를 내고 다만 마음의 눈을 떠서 느끼며 걸을 일이다.
 
떠날 때에는 늘 아쉬워 한강 물결을 바라보면서 뒤로 걷곤 한다. 뒤로 걸어본 적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렇게 걸으며 바라볼 풍경이 의미 있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후진하는 건가 싶은 때가 오더라도 좌절하거나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후진이 아니다. 삶의 방향을 재조정했을 뿐이다.


삶의 퍼즐, 그 퍼즐의 한 조각을 모으는 일일 뿐이다. 퍼즐 한 조각에 울고 웃고 하기에는 삶이라는 작품이 너무나 거대한 걸작이다.


 

작가의 이전글 시험보다는 시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