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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없는 글쓰기

by 김세은

감동 없는 글쓰기



헉! 글감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50분 막 지나고 있다.

어제는 평소보다 운동을 많이 한 탓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며칠 전, 금요일 수업 날.

폭설이 쏟아진 다음날임에도 열 명 남짓한 학우들이 수업에 참여했다. 유명강사님의 유튜브 강의를 함께 본 뒤, 내 차례가 되어 <낙엽 그리고 인생>을 발표했다.


“어때요?”

선생님이 물으시자, 뒤에 앉아 계시던 한 학우가 말했다.

“낙엽을 참 잘 묘사한 것 같아요.”

그러고는 바로 이어지는 한 마디.

“글은 깔끔한데… 김세은 씨 글은 감동이 없어요.”


그 말씀이, 지금껏 쓴 모든 글들을 뭉뚱그려 허공에 날려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나는 예전부터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제 글은 왜 이렇게 감동도 재미도 없을까요?” 선생님께 털어놓은 적도 있었고, 짝궁은 “잘 쓰긴 하는데 좀 이성적인 것 같아” 정제되어 있지만, 왠지 메마른 느낌.

심지어 누군가는 말했다.

“사랑을 많이 안 해봐서 그래요.”

…정답일지도 모른다.

“첫사랑이 남편이었어요.”

참, 재미없죠?


70년대, 보증 빚으로 빚쟁이들이 학교로 찾아올 만큼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 모든 어려움이 나에게는 상처라기보다 그냥 지나가는 바람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그 덕에 나는 아팠던 기억도, 치열하게 헤쳐 나온 상처도, 글에 고스란히 묻어날 만큼의 간절함도 갖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날 이후, 마음 한켠이 뻥 뚫린 듯 허전하고 우울했다.

‘감동 없는 글쓰기’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래서 절친들, 여고 동창, 여동생에게까지 ‘ 친구 평 듣기 과제’라고 뻥치고 그 글 “낙엽 그리고 인생”을 카톡으로 날려 보았다.


그랬더니 돌아온 반응들.


“아무 생각 없이 시계만 보다 깜짝 놀랐어. 와! 감탄이 터지네.”

“네 덕분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보는 시간이 되었어.”

“낙엽과 인생의 닮음을 글로 엮어내는 솜씨에 큰 박수 보낸다.”

“네 쌤이 실수한 거네.”

“보잘 것 없는 일상이 이렇게 의미로 채워질 수 있다니.”

“씨줄과 날줄로 엮은 글. 선물 같아.”

“나도 모르게 센티해졌어. 여백을 정리해보는 마음, 응원할게.”


깨똑 깨똑― 위로의 소리들이 연달아 울렸다.


눈 얼음판 위를 한걸음 한걸음 밟아가며 머리 속으로 글을 쓰며 걸었다.

사실 이 글은 애써 정성 들여 썼고, 먼저 쓴 글을 다음으로 미루며 발표했는데…


‘감동이 없다’는 무심한 쌤의 말씀 한마디가 모든 자신감을 무너뜨렸다.

“나는 글 쓸 소질이 없나 봐.”

“이쯤에서 물러서야 하나?”

자조 섞인 생각이 따라왔다.


그러나 곰곰이 돌아보니, 나를 온전히 드러내기보다,

나는 언제나 예쁘고 정제된 글만 쓰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당연히, 그 안에 울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반 학우들은 깊은 정서를 건드리는 글을 쓴다.

삶의 슬픔을 담아내고, 실천하게 만들고, 정보로 채워주고, 난해하지만 상식

이 되는 글,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고 글로 체험하게 해준다.

그날 이후, 하늘만큼 땅만큼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 마음 가는 대로 한번 써보자.”


그런데 지금, 새벽 어둠 속 아이폰 불빛에 기대어 글을 쓰는 내 모습이… 마치 작가 흉내를 내는 아이처럼 실없는 웃음을 자아낸다.

“ 잠이나 더 잘 일이지, 수필이 뭐 간디…”


바로 그 순간, 번쩍.

‘앗, 이거야!’

동공이 커졌다. 글감이다!


글감 하나 만나면, 작년 입던 옷 주머니에서 나온 공짜 돈 보다 더 기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샘솟듯 환희가 밀려온다.

“기쁘다, 글감 오셨네~ 내 마음 찾으러~”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작곡가가 불현듯 악상을 떠올리듯, 내 글도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서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새벽의 반란이다.

감격스럽고 뜨거운 무엇이, 나를 미소 짓게 했다.

글을 쓰니 무겁게 짓눌리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감사함이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게 한다.

머릿속 웅얼거리던 소음도 말끔히 가라앉았다.


선생님의 말씀이,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명약을 지어 주셨구나!

역시 글쓰기에도 당근과 채찍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불 꺼진 방, 떠오르는 문장들, 금방 사라질까 엎드려 쓴,

개발새발 그려진 글자들을 보고 있으려니 쓴웃음 한 바가지

큰 소리로 퍼 내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글을 쓴다.”


202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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