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어 가며 가장 먼저 충격을 받은 것은 ‘조력사(조력자살)’를 합법적으로 승인하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스위스로 조력사를 신청하는 사람이 급격히 늘고 있다는 점이었다.
존엄사나 안락사라는 말은 익숙했지만, ‘조력사’라는 단어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조력사란 ‘타인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안락사가 의사가 직접 약물을 투여해 생명을 중단시키는 것이라면, 조력사는 환자가 자신의 의지로 약물을 투여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자기결정권의 보장’이라는 명목으로 허용되는 제도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입법 논의가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생명윤리와 인간의 존엄,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까지 복합적으로 얽힌,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다.”
스위스에서 조력사를 신청한 한국인이 이미 300명 정도라고 한다.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자는 ‘웰다잉(well-dying)’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시대이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을 ‘타인의 일’로만 여긴다.
오디오 북으로 접한 『고요한 결심』은 구매해서 읽고 또 읽고 네게 무한한 감동과 울림을 주었다.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늙음과 죽음, 그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
이 책은 그 물음을 깊이 있게 던진다.
작가는 시어머니의 조력사를 지켜본 당사자였다. 시어머니 아를레트는 말기암 환자도, 중증질환자도 아니었다. 다만 ‘더 이상 인간답지 않은 삶’을 원치 않았기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삶이 아니야.”
“아직 정신이 또렷할 때, 이 고통을 끝내야 해.”
그녀의 결단은 필자에게 커다란 충격이자 숙제가 되었다. ‘살아 있는 존재의 죽음’, 아직 오지 않은 ‘가불된 애도’를 그는 받아들여야 했다.
책을 읽으며 나 역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약 나에게도 그런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작가의 친구의 사례를 보자
한 친구의 아버지는 중증 파킨슨병을 앓던 아내를 두 해 동안 연명주사로 붙잡았다. 너무도 사랑했기에, 보내지 못했기에, 죽음보다 더 잔혹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또 다른 친구의 어머니는 심정지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남편의 간절한 바람으로 몇 차례 심폐소생술이 이어졌고, 결국 갈비뼈가 으스러진 채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그 마지막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다.
책 속의 문장 하나가 오래 남았다.
“조력사(자유죽음)를 신청한 후 세 달 동안, 시어머니는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법을 지키며 살아온 그녀가, 이제는 법을 어기며 국경을 넘는다. 자기 자신으로 남기 위해 떠나는 여행. 그 몸도, 그 결심도, 그 삶도 오롯이 그녀의 것이다.”
마지막 날, 직원이 다시 묻는다.
“조력사를 원하십니까?”
시어머니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예.”
그 짧은 대답에 담긴 결연함은 삶을 끝내려는 절망이 아니라, 존엄을 지키려는 마지막 의지로 들렸다.
남겨진 가족들의 눈물 속에서도 시어머니는 말했다.
“울지 마라. 네가 울면 내가 힘들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누군가에게 고통의 기억으로 남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담당자는 조용히 말했다. “네, 끝났어요.”
존엄과 맞바꾼 죽음. 그 죽음 앞에서 나는 한참을 깊은 생각 속에 빠졌다.
‘자유죽음’을 택한 사람과, 질병 속에서 시한부 삶을 견디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다를까.
“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애도는 사라진 자리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자리를 기억으로 다시 채우는 일이라고”
내 곁을 떠난 이의 부재도 지난날의 기억을 조각조각 이어가며 내 삶의 일상과 함께하는 일 일것이리라.
시어머니의 결단을 통해 나는 다시 묻는다.
삶의 존엄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또 어떻게 떠날 것인가.
이 책은 죽음의 이야기를 넘어, ‘존엄하게 사는 법’을 우리에게 묻는다.
그리고 그 물음 앞에서 나는 오늘의 삶을 다시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