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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아블라 Mar 07. 2024

차마 틀지 못하는 영화가 있다

Dogtooth

3년만에 K를 만났던 날이었다. 그녀는 선물이 있다며 가방에서 꼬깃 접힌 종이를 꺼내서 건넸는데, 잔뜩 설레는 마음으로 펼쳐보니 초대형 영화 포스터였다. 처음 들어보는 영화였다. 고마워, 근데 이게 뭐야? 라고 물으니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라고 한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Dogtooth인데 한국어 제목은 잘 모르겠지만 분명 내가 좋아하는 영화라고 생각해서 어느 서점에서 발견하고는 나를 위해 챙겨왔다고 한다. 


봉준호와 타란티노, 그리고 공드리 감독의 영화에 단단히 빠져있던 그 시절의 나는 요르고스 어쩌고가 누군지 잘 몰랐다. 찾아보니 영화의 한글 제목은 송곳니라고 하는데, 들어본 적도 없는 영화였다. 선물 자체보다 이걸 멀리서부터 꼬깃하게 챙겨온 그녀의 마음이 고마웠다. 나는 이 영화 잘 모르는데 무조건 좋아할 것 같아, 고마워 라고 대답했다. 


그날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는데, 사실 그게 언젠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2014년 쯤이었는지, 2017년 이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포스터를 받아든 것이 석촌호수였는지, 워커힐 지하의 클럽이었는지도 헷갈릴만큼 그저 오래전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뿐만 아니라 그녀와의 추억은 항상 흐릿하게 남아있다. 우리는, 아니 나는 그녀를 제일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있었지만 연휴가 다가올때마다 나는 그녀에게 연락해서 그녀가 살고 있는 지역으로 놀러가겠다고 했고, 그녀는 나를 위해 연휴 내내 시간을 내주었다. 나는 1인석 이코노미 좌석을 일시불로 끊을 만큼의 여유가 있었고, 그녀는 룸메이트가 집을 비우면 나를 재워줄 한켠의 공간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별 거 아닌 일에도 우리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함께 무언가를 할 때면 나는 마치 그녀와 영혼의 어느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비밀 일기처럼 꽁꽁 숨겨둔 개인 블로그 주소를 나에게 메신저로 공유했고 나는 에밀리 브론테의 시 구절을 댓글로 달아두곤 했다. 


아리조나에서 그녀의 집에 머물던 어느 날, 쏟아지는 별을 보고 싶다는 나의 말에 그녀는 바로 라이드와 캠핑 장비를 구해줬다. 우리는 남의 차를 얻어타고 사막에서 벌벌 떨며 쏟아지는 별을 실컷 감상했다. 내 인생에 그렇게 많은 별을 본 적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다음 날에는 그녀의 집에서 한참을 빈둥거리다가 해가 지자 음악을 크게 들어놓고 와인을 각자 한 병씩 마셨는데, 갑자기 서로의 헤어스타일을 바꿔주기로 했다. 그녀는 단발을 해본 적이 없었고, 나는 앞머리를 자른적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길고 긴 생머리를 칼단발로 만들었고 그녀는 나에게 앞머리를 만들어주었다. 물론 와인 한 병과 문구용 가위의 결과로 둘 다 한층 못생김을 얻었고, 우리는 거울 속 서로의 얼굴을 보며 한참을 깔깔거렸다. 


그녀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자기가 있을 곳도, 있고 싶은 곳도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럼 이제 언제보나, 아쉽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지만 속으로 서운함이 밀려왔다. 당시 나는 한국에 돌아와 한참 정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때였는데, 그녀가 한국에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 마치 나에게 이별을 말하는 것만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나, 나는 그녀의 앞길을 응원했고 한번 서로를 꼭 껴안고 다음에 보자는 인사없이 우리는 헤어졌다. 


지금도 서랍 깊숙히 그녀가 준 영화 포스터가 있다. 어렸을 적부터 영화를 매우 좋아했고, 영화 포스터를 모으는 것이 취미여서 시간이 나면 메가박스에 들러 진열되어 있는 영화 포스터를 모조리 가져오곤 했다. 특히 공포영화를 매우 좋아하는데, 내 취향을 잘 아는 그녀의 표현으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는 매우 난해하지만 사회적인 메시지가 분명해서 내가 좋아할 거라고 했다. 


어느 날 OTT에서 영화 더 랍스터를 발견했다. 송곳니와 함께 그녀가 언급했던 기억이 있어 망설이지 않고 냅다 틀었다. 그녀가 말한대로 내가 좋아할만한 영화였다. 연달아 킬링 디어까지 감상했는데, 정작 마음의 숙제처럼 남아있던 송곳니는 차마 틀 수가 없었다. 짜증나게도 그녀가 추천한 그 영화는 내가 좋아할 것이 분명했지만, 나는 그녀와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차마 끊어낼 수 없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녀와의 추억은 이제 더 이상 내게 없다. 


그녀는 SNS를 하지 않아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가 너무 좋았다고 아직 전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코로나에 걸리지는 않았는지 잘 모른다. 가끔은 내가 빠진 인생을 너무나도 잘 살고 있을 그녀가 야속하다. 그냥 영화 재밌게 보고 인생 한 편에 고이 간직하고 넘어가면 쉬울 일을, 왜 이렇게 완결내지 못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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