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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 May 28. 2024

환상의 세계를 유영하는 음악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 제104회 정기연주회 ‘몽환’

지난 5월 1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 제104회 정기연주회가 열렸다. 낭만성이 극대화되는 ‘환상’이라는 키워드에 대한 흥미로 선택하게 된 이번 연주회는 <몽환>이라는 부제를 가진다. 제목에 걸맞게, 총 세 곡의 레퍼토리를 통해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몽환과 초월의 여정’을 안내한다. 아르튀르 랭보의 시에 음을 붙인 연가곡 ‘일뤼미나시옹’과 라벨의 ‘어미거위 모음곡’, ‘라 발스’를 통해 전체적으로 예측할 수 없고 현실에서 벗어난 환상의 세계를 음악적으로 표현해냈다.  



  

Les Illuminations Op.18 (일뤼미나시옹) - B. Britten 


‘일뤼미나시옹’은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이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마지막 시집 ‘일뤼미나시옹’에서 시를 발췌해 곡을 붙이면서 탄생한 가곡집이다. 랭보는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로 불리며 초월적인 감각과 환각 상태의 경지에 도달해 우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견자’가 될 것을 선언하며 사회적 관습에 도전하는 반항아적인 행보를 이어갔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랭보의 시들은 1930년대 당시 여러 인간적인 관계와 냉전 시대 유럽의 불안한 사회적 상황, 영국에서의 음악 활동에 대한 회의 등으로 혼란스러워하던 브리튼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일종의 도피처 혹은 돌파구를 제공하였다고 알려진다. 

랭보의 다른 시들과 다르지 않게, ‘일뤼미나시옹’에 담긴 시는 복잡하고 난해한 단어와 문장 구조의 사용, 수많은 생략과 은유 등으로 인해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고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브리튼은 이러한 랭보의 시를 발췌해 이를 음악이라는 형태로 청각화함으로써, 랭보의 작품세계와 대중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자청하였다. 이번 연주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허물고 ‘일뤼미나시옹’이 가진 시공을 초월한 혼돈과 자유의 서정을 풍부하게 표현하고 전달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랭보로부터 이어져 오는 환상의 세계를 함께 유영할 수 있도록 했다. 


가수가 현악 앙상블과 함께 연주하는 이 가곡집은 해당 연주회에서는 소프라노 황수미가 협연을 맡았다. 특히 가곡의 내용과 분위기에 따라 마치 연기를 하는 듯한 소프라노의 섬세하고도 강렬한 표현력이 빛을 발했다. 두 번째 곡인 ‘도시들(Villes)’에서 포효하듯 강렬한 하이톤의 멜로디를 통해 역동성과 혼돈의 범람을 형상화하는 한편, 연인의 육체를 탐미하는 내용의 곡 ‘아름다운 존재(Being Beauteous)’에서는 환각적으로 흘러가는 듯한 반주와 함께 사랑에 빠진 듯한 표정으로 섬세하고 나른한 음색과 창법을 구사했다. 이러한 소프라노의 섬세한 연기와 표현은 풍부하고 정교한 오케스트라 연주와 합을 이뤄 음악을 통해 가사의 원문이 되는 시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그려내었다.   



Ma Mère l’Oye (어미거위 모음곡) - M. Ravel 


‘어미 거위’는 드뷔시와 함께 프랑스 근대음악을 대표하는 모리스 라벨의 관현악 소품집으로, 그는 여러 가지 환상적인 동화들에서 영감을 얻어 기존 피아노 연탄곡집의 곡들을 관현악 모음곡으로 편곡하여 발표하였다. 라벨의 정교한 관현악법이 적용되어 아름다운 동화 속 장면들이 섬세하고 다채로운 음악으로 채색되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연주회에서는 이 곡이 가진 동화적인 성격을 풍성한 연주로 구현하며, 단순하고 아기자기한 동화적 환상을 표현한다. 


특히, 제3곡 ‘탑의 황후 레드로네트’는 동양풍의 음계와 타악기 소리가 풍부하게 어우러져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정서를 이끌어낸다. 마치 동양의 어느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인상까지 들게 하며 이국적인 환상의 동화를 음악으로 표현해냈다. 


마지막 곡인 제5곡 ‘요정의 정원’도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환상의 세계를 단지 오케스트라 연주만으로 풍부하게 그려낸다. 제1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속편에 해당하는 이 곡은 느린 템포의 3박자 선율이 꿈 꾸는 듯 흘러가다가, 마지막에 다양한 악기가 다채롭고 풍성한 하모니를 이루며 요정들이 축제를 벌이는 숲 속 정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왕자가 공주를 발견하고 아침 해가 떠오르며 찬란하게 마무리된다는 서사가 담긴 마지막은 행복이 담긴 듯 따뜻하고 동화적으로 전개되며 여느 동화들의 “그렇게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하는 엔딩 장면을 청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듯했다.   



La Valse - M. Ravel 


당초 발레 음악으로 작곡되었던 ‘라 발스’는 전체적으로 왈츠 리듬을 따라 흐르며, 라벨이 악보에 붙인 서문에 서술된 동화적인 장면을 음악을 통해 표현한다. 안개가 내려앉은 듯 어지럽고 잔잔하게 일렁이던 연주는 점차 활기를 띠며 눈부시게 빛을 내는 샹들리에와 춤을 추는 사람들로 가득한 무도회장의 모습을 비롯해 꿈 속과도 같은 몽환적인 장면들을 형상화한다. 이후 등장하는 포르티시모에서는 역동성이 극대화되며 빛이 충만해진 샹들리에와 고조되는 무도회장의 분위기를 표현하며, 이 이후로는 다채로운 리듬과 악기의 멜로디가 주기적으로 반복, 교차되며 이어져 흥겹고 북적거리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 곡은 종결부의 강렬하고 파괴적인 끝맺음이 특히 인상적인데, 이전에 등장했던 리듬과 멜로디가 계속해서 교차되어 등장하며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고조시키다가, 굉음과도 같은 강렬한 사운드의 폭발과 함께 음악이 무너져 내리듯 막을 내린다. 다소 파국적이기까지 한 이 결말은 ‘왈츠 시대의 종언’ 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과 같은 단정적인 종결로 종종 해석되곤 한다. 이를 고려했을 때 연주회 전체의 끝맺음을 담당하는 이러한 종결은 2시간 가량의 환상의 여정을 끝내고 현실로의 복귀를 촉구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이번 연주회는 브리튼과 라벨, 나아가 랭보와 수많은 동화들이 가진 환상적인 세계를 음악으로 그려내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뤼미나시옹’부터 ‘어미 거위 모음집’, ‘라 발스’까지 이어지는 음악의 여정은 관객의 손을 잡고 혼돈과 무질서가 동반되는 초월적 세계의 환상, 몽환적인 무도회장의 분위기와 사랑스러운 동화 속 장면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환상의 세계를 유영한다. 




이렇듯 연주회 전반이 음악을 통해 말하고 있는 ‘환상’은 혼돈에서 동화적인 상상까지 비교적 넓은 범주의 환상을 다루고 있다. 이는 감상자가 기대하던 의미의 환상 혹은 몽환이라는 키워드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다는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시대의 음악을 하나의 주제로 연결지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특히, 섬세하고 풍부한 오케스트라 연주는 인상파 음악과 상징주의 문학, 낭만주의적인 특징을 모두 ‘환상’이라는 한 가지 키워드로 관통시키며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그려갈 수 있는 음악 장르의 강점을 십분 발휘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아트인사이트 기고글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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