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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살리에리를 발견하다

불완전한 인간의 결핍과 질투 - 연극 <아마데우스>

by 소영

여기, 한 예술가가 있다.

오스트리아 빈의 촉망받는 궁정 음악가인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 살리에리’.


어쩌면 맹목적일 만큼 신을 섬기며, 신에 대한 믿음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스스로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믿던 살리에리는 평범한 자신과는 달리 신이 내린 천재성을 지닌 모차르트를 마주하고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다.


연극 아마데우스 포스터.jpg

연극 <아마데우스>는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평범한 궁정 음악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신의 은총을 받은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심리적 갈등을 치밀하게 묘사해 낸 작품이다. 특히, 연극과 뮤지컬, 오페라의 장르적 특성이 혼합된 형태의 연출을 통해 당대의 현실은 물론,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음악과 오페라를 무대 위에 생생하게 재현한다. 이렇게 연극적 대본과 음악, 그리고 극중극으로 진행되는 오페라가 조화를 이루며, 관객은 살리에리가 보고 들어 온 것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그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연극의 중심 서사는 화자인 살리에리가 스스로의 질투와 욕망에 대해 오늘날의 관객에게 고해하는 흐름으로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갖지 못한 살리에리의 결핍과 고통, 모차르트에 대한 질투심과 신에 대한 원망,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목소리’로 대변되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입체적이고 복잡한 심리가 세밀하게 표현된다. 특히, 살리에리가 단 한 번도 수정한 흔적이 없는 모차르트의 악보를 보고 ‘나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보고있다’며 환희를 느끼면서도, 근면과 깊은 신앙심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재능을 주지 않은 신을 원망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이렇듯 연극은 결핍, 고통, 질투, 원망, 환희를 넘나드는 그의 복잡미묘한 내적 갈등을 치밀하게, 그리고 다면적으로 묘사해낸다.



결핍의 아이러니


살리에리라는 인물은 총체적 아이러니이다. 그는 ‘신이 내린 음악’과 그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졌으나 그런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재능은 갖지 못했다. 신앙과 음악에 매진해 그를 궁정 음악가로 만들어준 살리에리의 음악적 재능은 모차르트라는 천재 앞에서 너무도 평범해진다. ‘천재’ 모차르트가 자신과는 달리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다는 사실은 살리에리에게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한편, 살리에리는 근면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하며 신앙과 음악만을 쫓지만 한편으로는 권력에 대한 열망과 사회적 체면을 가장한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신을 섬기고 그 대가로 재능을 부여받았다고 여기는 생각부터 순수하지 못했을 수 있다.


단순히 모차르트에 대한 질투심으로 ‘모차르트와의’ 싸움을 통해 타락하기 시작했던 살리에리는 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의 음악을 전달할 도구로서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신에게 분노하며 ‘신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그 방식은, 신이 선택한 모차르트를 망가뜨리는 것이었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교묘하게 망가뜨리면서도 그의 음악만은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너무나도 갈망하는 천재적인 재능과 음악을 지닌 모차르트를 미워하면서도, 그의 모든 공연과 음악을 통해 환희를 경험하고, 자신이 가한 고통 속에서도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낸 모차르트에게 왜인지 모를 경외심을 느낀다.


그러나 살리에리가 그렇게 질투하는 모차르트도 완전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일평생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결핍 속에서 살아야 했다. 권위적인 아버지와의 애증 섞인 갈등부터 사치와 낭비로 인한 경제적인 문제, 그리고 이로 인해 콘스탄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는 경험을 하며 끊임없이 ‘왜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는지’에 대해 고뇌한다. 살리에리와는 반대로, 경제적인 관념이나 자립의 능력, 사회적인 기술은 부족했지만 오히려 순전히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재능만을 품고 있던 인물인 셈이다. 극 말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 질문의 답을 찾지 못했던 모차르트가 오늘날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작곡가가 되었다는 점은 더욱 아이러니하다.


결국 인간은 모두 스스로가 갖지 못한 것으로 인해 고뇌한다. ‘나는 왜 평범한가’ 질문하며 신을 원망하는 살리에리와 ‘나는 왜 사랑받지 못하나’ 고민하는 모차르트,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결핍으로 인해, 그리고 그 결핍을 인정하지 못한 채 부족한 지점을 채우려는 데에만 집착하며 고통받는다.



평범함의 수호자


약 3시간에 걸친 살리에리의 고백을 지켜보며 관객은 그에게 염증을 느끼기도, 안쓰러움을 느끼기도, 그를 비난하기도 하고, 나아가 살리에리에게서 스스로의 못난 모습을 겹쳐보며 극중 인물이 아닌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한다. 내가 간절히 원했지만 갖지 못했던 것에 대한 집착과 갈망, 그것을 간절한 마음 없이도 당연히 가지고 있는 이에 대한 질투,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만든 신에 대한 원망. 우리는 삶의 어느 때에 모두 한 번쯤은 살리에리와 같은 마음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 스스로를 ‘평범한 이들의 수호자’라 칭하며 관객석을 가로질러 퇴장하는 살리에리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살리에리’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함은 물론, 이렇게 불완전하고 못난 모습을 인정하고 사랑하며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준다.



[아트인사이트 기고글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8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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