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으로 차려낸 심판의 식탁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단편 <사고(Die Panne)>를 원작으로 한 서울시극단의 블랙코미디 연극 <트랩>이 다시 무대에 올랐다. 11월 7일부터 3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되는 이 작품은 유쾌한 소동극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안에는 인간 내면의 위선과 죄의식을 정조준하는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다.
극은 출장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시골 마을에 고립된 주인공 트랍스가 은퇴한 법조인들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으며 시작된다. 전직 판사, 검사, 변호사, 그리고 사형 집행관이 모여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함께 벌이는 ‘법정 놀이’는 일견 기괴하고 엉뚱한 유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가벼운 놀이는 트랍스가 스스로 무결하다고 믿었던 자신의 삶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치닫는다.
<트랩>은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채 죄를 짓기도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유머와 아이러니로 변주한다. 트랍스의 죄는 법전에 있지 않다. 그는 상사가 심장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의 아내와 간통하고, 상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이는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있으나 현실의 법정에서 유죄가 선고될 사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상사의 죽음과 트랍스의 행동이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의 법정은 법이 닿지 않는, 오직 양심만이 심판할 수 있는 영역을 파고든다.
연출상 주목할 만한 지점은 단연 재판의 진행과 만찬의 정교한 병치에 있다. 식전주로 시작해 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다섯 가지 요리와 다섯 가지 와인으로 구성된 만찬은 재판의 진행 양상과 완벽하게 호흡을 맞춘다.
산뜻한 화이트 와인 ‘시칠리아 그릴로’와 함께 가볍게 시작된 심문은, 코스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심오한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베일에 싸여 있던 트랍스의 과오가 하나둘 벗겨질수록 페어링되는 와인의 바디감은 묵직해지고, 마침내 1893년산 ‘샤토 마고(Château Margaux)’가 등장하는 순간 트랍스에게 이 모의법정 최초로 사형이 선고되며 극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이렇듯 미각적 쾌락과 도덕적 파멸이 동시에 절정에 이르는 연출은 관객에게 기묘한 카타르시스와 불쾌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배우들이 실제로 음식을 먹으며 연기하는 설정은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며 관객의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전형적인 부유층의 다이닝룸을 닮은 무대는 삼면이 객석으로 둘러싸여, 동시에 법정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관객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다. 무대 위 배우들의 숨소리와 음식 냄새를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이 기이한 재판의 ‘배심원’이 되어 등장인물들과 함께 재판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에 가사도우미 ‘시모네’가 라이브로 연주하는 피아노 선율은 극장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연회장이자 법정으로 탈바꿈시키며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한바탕 유쾌한 놀이로 마무리되는 듯했던 이들의 재판은 예상치 못한 트랍스의 자살로 충격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폭소와 환희 속에 내려진 ‘사형 선고’를 그저 유희로 넘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던 트랍스는 대체 왜 죽음을 택했을까? 명쾌한 해답은 찾을 수 없지만, 트랍스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잘못을 마주했을 때 느낀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의 무게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트랍스는 법에 의한 처벌보다도 가혹한 것이 바로 스스로의 양심과 도덕이 내리는 형벌임을 깨달았던 것이 아닐까?
역설적이게도 트랍스는 죽음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도덕적 책임을 완성한다. <트랩>은 결말의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웃고 즐기던 관객들에게 날카로운 성찰을 남긴다.
법적으로 죄가 없다면, 당신은 정말로 결백한가?
의식하지 못한 채 이름 모를 죄를 짓고,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유쾌한 농담 뒤에 남겨진 이 묵직한 질문은 비단 무대 위 트랩스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배심원석에 앉은 우리 모두를 향한 날카로운 심문이다.
[아트인사이트 기고글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84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