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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향 Mar 04. 2024

추상화가의 추상적 웅얼거림

‘피치 퍼즈’의 향기


한 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즈음의 전화기에는 새해 인사들이 넘쳐난다. 각기 다른 사람에게서 같은 이미지를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럴 때 나는 어떤 메시지로 답해야 하나 괜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 마음만 주고 받으면 되는 일을 괜히 형식에 몰두하는 습성이 내게 있는 것이다.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낼 재간도 없고 여러 사람에게 동일한, 복제된 이미지를 날리지도 못하고. 해서 머뭇대다가 더러 시기를 놓치기도 한다. 대개 이런 경우 나는 그 사람의 이름을 넣고 상대가 명백히 자신에게만 보내는 메시지라고 느끼도록 답장을 쓴다. 그러고 나면 좀 마음이 편하다.     

학교에 있을 때 학생들에게 늘 하던 질문이 몇 개 있는데 ‘인간이 만든 가장 크고도 대단한 거짓은 뭐일 거 같아?’도 그 중의 하나였다. 물론 나는 답을 가지고 물어본다. 대답은 ‘시간’이었다. ‘얘들아. 시간이란 게 말야, 선생님 생각에는 인간이 만든 가장 거대한 거짓말인 거 같아. 같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데 동물에게는 시간이 없지 않아? 그냥 밤과 낮, 추위와 더위가 있을 거잖아. 오늘과 같은 내일이 올 건데 거창하게 송구영신하고 인사를 나누는 건 인간밖에 없어. 그러니까 시간이란 건 마치 바다 위에 촘촘한 철망을 얹어놓은 것 같아. 그 철망의 한칸 한칸이 일년, 한달, 하루 혹은 일초가 되는 거지. 그래서 때로 초조하고 때로 느긋한 거 아닐까? 그 철망 때문에. 하지만 그 아래를 보면 그냥 바다가 있을 뿐이야.

하지만 그 철망은 대단한 발명품이야. 하염없이 균질할 시간을 매듭을 지으면서 우리 삶을 잠시 멈춰서서 뒤돌아보게 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점검하게도 하니까.’     


화실 생활이란 것이 사실 어찌 보면 철망을 걷어버린 바다와 같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특히 전시가 뜸한 겨울철에는 더 그러하다. 오롯이 자신만으로 이루어진 시간을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겨울에 내가 몇 해 전부터 새해의식처럼 해 오는 작업이 있다. 새해의 팬톤 컬러로 첫 작업을 하고 사인을 하는 것.

 팬톤컬러란 팬톤컬러연구소가 전세계에 산재해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해의 문화적 사회적 동향을 분석, 예측하고 그 결과물로 당해 연도의 컬러를 발표하는 것인데 한 해의 패션, 인테리어, 제품디자인 등 문화 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발휘하게 된다. 올해 연구소는 2024년의 팬턴 컬러로 오렌지빛과 복숭아빛이 묘하게 섞인 ’피치 퍼즈‘를 제시하였다. 지난해 전 지구인에게 닥쳤던 전쟁과 기후 위기 그로 인한 경제적 고통에 대한 치유가 필요하다고 해석한 것이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포용적인 색, ’피치 퍼즈‘를 통해서 휴식과 치유가 필요한 시대라고 진단한 것이다.     

나도 언제나처럼 한 해의 시작을 올해의 팬톤컬러로 완성하기로 했다. 워낙 내부적 지침이 없는 작업을 하는지라 색이 하나 지정된 것만으로도 새해의 작업을 시작하기 좋아 택한 방법이었다. ’피치 퍼즈‘가 만들기 쉬운 색이 아니어서 나는 물감을 한참 쓰고서야 마침내 조색할 수 있었다. 오렌지와 살구빛을 띤 부드러운 색으로 작품을 완성하고 사인을 하고 나니 그 색이 내 안에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도 지난해는 참 다사다난하고 힘든 해였는데 ‘피치 퍼즈’의 부드러운 손길로 위무받는 듯했다. 우리 모두에게 올해 팬톤컬러의 색감과 향기가 깃들었으면 좋겠다. 해피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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