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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낭콩 할머니와 한국 사회

MZ세대인 나, 사실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한국이 싫었어.

by Beth

버스가 정류장에서 멈춰 부리나케 짐을 챙겨 내렸을 때였다.


정류장 바로 앞 보도블록이 끝없이 이어진 길 위에는,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평일과 주말을 막론하고 매일같이 바닥에 앉아 나물을 파신다.


오늘 팔지 않으면 금세 시들어버릴 것 같은 상추와 깻잎 그리고 호박 줄기 같은 야채들이 바구니마다 한가득 담겨 있다.


나는 사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습관처럼 강낭콩 값, 부추 값을 쓱 훑으며 지나간다.


줄의 끝에 다다랐을 때,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계신 한 할머니가 눈에 들어온다. 아흔은 훌쩍 넘으신 듯 보인다. 거동도 불편하신 것 같다.


할머니는 사람들과의 눈을 피해 눈을 바닥으로 고정시키신 채, 눈앞에 펼쳐놓은 검은콩과 강낭콩을 사람들이 사가길 하염없이 기다리고 계신다.


사실, 할머니를 처음 뵌 건 벌써 반년 전이다.


숨 넘어갈 듯이 더운 여름에도, 커다란 파라솔 같은 우산 하나에 의지해 장사를 하셨다. 비가 조금 오는 날이면, 여느 때처럼 바닥에 앉아 나물을 파셨다. 그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현재 가을까지, 자리를 지켜오고 계신다.


나는 길을 지날 때마다 할머니에게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얼굴빛이 더 안 좋아지신다. 낯선 할아버지가 대신 앉아 있는 날이면, ‘오늘은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닐까’ 하고 걱정이 앞선다.


한여름 땡볕 아래, 숨쉬기조차 힘든 날에도 할머니는 항상 앉아 계신다.


그럴 때마다 난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니, 오늘 같은 날엔 좀 쉬시지…”


그러면서도 나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할머니 앞에 다가가 부추 한 단이라도 사드리지 못한 내 모습.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 앉아, 제때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깨끗한 옷을 입는 내 모습이 자꾸 겹쳐 보였다.


할머니는 부추 한 단에 이천 원, 보라색 고구마 한 바구니를 삼천 원에 내놓으셨다. 물가를 생각하면 정말 터무니없이 싼값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가서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끝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그 순간, 난 소극적이고 비열하고 이기적인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분명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 살아내기에도 벅차, 모른 척 지나쳤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게 잘못은 아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할머니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한국의 역사가 겹쳐 보인다.


전쟁 직후, 아무것도 없던 시절. 아이들 먹여 살리느라 건강이나 자아실현은 무슨 하루하루 생존이 급급했던 시절 말이다.


그 앞에서 난 나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다.. 한국이 싫어졌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대한민국은 원래부터 잘 살던 나라가 아니다.


돈 한 푼 벌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셨던 증조·조부모 세대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온 나라다.


그분들께선 자아실현은 무슨 당신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새끼들 먹여 살리기 위해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당신들의 청춘을 바치셨다. 그리고 그분들껜 그 선택이 당연시 됐던 시대였다.


자원은 개뿔 이 나라엔 사람 말곤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등 따시게, 맛있는 걸 먹으며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야 한다. 피땀 흘리신 기성세대 분들 덕분에 지금의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물론, 난 이 작금의 사회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7세 고시' 같이 아이들의 창의력과 자율성을 파괴시키는 파시즘적인 경쟁 교육, 끊어진 계층 사다리와 날로 갈수록 심해지는 빈익빈 부익부, 말도 안 되는 높은 집값, 온 영역에 뿌리내린 배금주의 사상과 유교 문화의 컬래버레이션, 자기 배만 불리는데 급급한 정치인들, 나라의 정변이 일어나거나 위험이 부닥쳤을 때 나 몰라라 나라를 버렸던 조선시대 선조부터 친일파, 내로남불의 끝판왕인 현 기득권 세력들,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 자살률 1위, 행복도 최하위 국가를 차지하는 랭킹까지 …. 한국 사회에 대한 불만은 끝이 없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한다.


동시에, 더 나은 사회를 만들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앞으로의 젊은 세대가 짊어져야 할 몫이다.


그러니, 아무리 힘들고 지치고 모든 걸 내려놓고 싶어도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자.


이기적인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우리도 어떻게든, 악착같이 서로 잘 살아갈 방법을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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