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왜 우울한 국가가 되었고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가?
길가를 지나가다 보면 우연히 각 지역 정신건강지원센터에서 매단 우울증 예방과 관련한 현수막을 보게 된다.
현수막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우울할 때 000-xxxx-xxxx로 전화 주세요. 언제든 상담이 가능합니다. 삶이 힘들 때, 도저히 힘이 없을 때 정신건강 센터로 전화하세요."라는 취지의 내용이 적혀 있다.
솔직히 이것을 보며 든 내 생각은, 국가가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방법'이라기보다는, '체제에 순응하지 못한 사람들을 그래도 어떻게든 붙잡아 두고자 하는 일종의 국가 유지 전략을 기반으로 한 웃긴 복지 정책'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무 비관적이고 냉소적이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저런 현수막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쳇바퀴 같은 무한 경쟁 한국판 오징어 게임에서 도저히 못 버티겠어서 탈주하고 싶은 사람들은 '국가'에 연락하세요. 당신들은 국가의 인적 자원이고, 우리는 인적 자원을 써먹어야 하니, 이 게임판에서 나가버리면 국가 경쟁력이 무너집니다. 연락 주세요."
슬프게도, 이것이 우리나라 현실이다. 한국은 철학과 인문학을 일찍이 배제했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철학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일단 자기 생존을 우선하고, 철학이든 인문학이든,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든 과정은 중요하지 않고 일단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정치권과 기득권도 이런 사고로 나라를 운영해 왔다.
그 결과 생긴 문제가 무엇인가?
나라가 먹고살 만해졌음에도, 사회 전반에 깔린 우울감과 공동체 의식 결여는 점점 심화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사람이 아니면, 길가에서 누가 쓰러져 있든, 아프든, 어려운 상황에 있든 다른 사람을 돕기를 피한다. 자신에게 위해가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면, 각자 핸드폰 세상 속으로 빠져든다. 그렇게 국가는 점점 더 개인주의화되고, 공동체 의식은 결여되며, 나라의 활력은 빛을 잃어간다.
또 다른 문제는 무엇일까? 바로 한국의 미래 세대, 즉 현재 유치원 초중고 어린아이들이 잔인한 입시 지옥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잘못인지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은 결여된 채, 앞만 보고 내달리는 레이스를 하고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사교육 경쟁은 점점 낮은 연령으로 내려가며, 의사를 서민층 최고 직업으로 여기고 7세부터 사교육에 넣고 의대 입시반에 보내는 식이다. 현재는 7세 고시가 4세 고시로 내려가는 상황까지 왔다. 아이들의 미래는 영유아 때부터, 아니 어쩌면 수정되기 전부터 결정된 것일는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인 '자아실현'을 실현할 수 없는 아이는 우울감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상에 아무것도 모른 채 태어난 아이가, 부모의 기대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길 없는 채로 학원에 다니며 성장한다. 그렇게 자기 확립을 다져야 할 황금 같은 청소년기를 지나, 대학생이 되어 사회라는 더 잔인한 무한 경쟁 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 극심한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고 사회 초년생이 되고 어엿한 직장인이 된다. 자연스럽게 남은 삶을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잊은 채 살아야 하는 열차에 탑승하게 된다. 열차 중간에서 의식이 깨어 발버둥 치며 빠져나오려 하면, 주변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거센 파도를 맞는다. 파도를 맞느니 순응하며 사는 것이 편하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포기하기도 하고, 발버둥 칠수록 극심한 우울감과 절망감에 빠지기도 한다. 깨어 있는 친구들일수록 더 큰 우울감과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
결국, 현재 한국에서 시행되는 정책은 근본적 문제 해결을 회피한 채 “오징어 게임판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줄이고, 국가 차원에서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저런 현수막을 내걸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