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선에 서면 부상에 대한 두려움이 늘 앞섰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2년 정도 됐을 때 너무 열심히 뛰었다. 매달 150km 이상을 달렸다. 매일 5km를 뛴 셈이다. 쉬는 날도 있었지만, 쉬었다면 다음번 달리기에서 거리를 채웠다. 나에게는 과욕이고 무리였다. 무릎 허벅지 허리까지 돌아가며 아팠고 결국 병원 치료도 받았다.
부상 없이 달리고 싶었기에 거리 욕심을 버렸다.
달리기 횟수도 줄이고 휴식을 충분히 해줘도
무릎이 아팠다. 대체 왜? 끊임없이 생각했다.
발과 인체 구조, 달리기 등등 관련 책들을
꼬리물기 식으로 파보았다.
<달리기의 모든 것 / 남혁우>에서
'과도한 쿠션은 부상 감소 영향에 미미하고
우리의 발 무릎이 지면에 적응하는 능력을 감소시킨다.'
라는 연구 결과가 눈길을 끌었다.
<맨발, 달리기가 즐거워진다/ 켄 밥 색스턴, 로이M. 월렉>에서는
'달리기로 인한 부상은 운동화가 원인일 수 있다.'라는
문장 역시 머리에서 계속 맴돌았다.
마침내 해결 단서를 발견했다.
맨발이었다. 적합한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맨발은 아스팔트나 고무 트랙 등 인공구조물 위에서는 아니다. 결국 내가 자주 뛰던 동네 뒷산으로 향했다.
매주 와서 익숙한 장소인데 바짝 겁쟁이가 됐었다.
맨발을 주차장 흙바닥에 내려놓기까지
오만가지 생각에 휩싸였다.
발을 다치면 어쩌나, 나뭇가지에 찔리면 어쩌나
걱정이 태산 같았다.
도착한 지 20분 만에 바르르 떨다 첫발을 땅에 댔다.
‘오 괜찮은데, 시원한데.’ 이날은 날씨마저 좋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하던
질문과 의구심 자체가 사라졌다.
여전히 겁보라서 밴드에 물티슈
등산화까지 들고 산으로 들어갔다.
등산로 위에서 걸을 때 어찌나 온몸에 힘이 들어가던지 웅크린 어깨, 구부정한 허리, 발바닥에서 전해오는
‘까슬함’, ‘따가움’에 어리둥절했다.
10분도 채 안 지났는데 십리 길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시선은 발끝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보니 맨발의 두 여성이 자연스럽게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를 만큼 어색하고 불편한데 두 사람은 편안해 보였다. 더 놀라웠던 것은 잠시 뒤 한 여성이 맨발로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저게 가능하다고? 순간 <맨발 달리기가 즐거워진다>라는 책에서 본 한 여성 러너의 모습이 떠올랐다. 완벽한 자세의 맨발 러너였다. 바닥은 이곳 등산로처럼 작은 돌과 나뭇가지들이 있었다. 사진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그런데 처음 맨발을 시작하자마자 산에서 맨발로 뛰는 사람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다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더 오르자 많은 이들이 웃고 떠들며 편안하게 맨발로 걷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내 마음도 조금은 편해졌다.
한 고개를 넘어 평지 능선 구간에 다다를 즈음 혼란스러운 마음은 가라앉고 잔뜩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느낌이구나.’ 발에 미안해졌다. 신발로 인해 내 발이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각이 발끝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 위기가 찾아왔다. 1km쯤 걸었을 때 갑자기 발바닥에 설명하기 힘든 강한 느낌이 확 밀려왔다. 분명히 따가운 것은 아닌데, 절대 아픈 것도 아닌데 이 자극은 무엇일까. 심장박동이 치솟고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스트레스 때문인가? 이대로 멈추고 돌아가야 하나? 이 불편한 느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생각했고 발 바꾸기를 자주 하면 발바닥의 불편함이 줄어들 수도 있겠지. 살짝 뛰다가 걷다가 정신없이 정상에 도착했고 신통했다.
신기한 일은 그날 밤에도 있었다. 발바닥이 계속 신호를 보냈다. 아프지는 않지만 약간의 찌릿한 느낌이었다. 아주 새로운 감각 때문이려니 했다. 그날 이후 동네 뒷산을 오르고 또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로 평지 구간이 나오면 가볍게 뛰었다. 매일매일 가고 싶었고 퇴근 후에도 찾아가 걷고 뛰다 보니 속도가 붙었다.
어느 날은 너무 열심히 뛰다가 발바닥 앞축이 뜨거워져서 묵직하고 욱신거렸다. 계속 아팠으면 다시는 못했겠지만 몇 번 불편했을 뿐 부상은 절대 아니었다. 그것이 다였다. 그 고비를 넘기고 나서 새로운 질문이 나를 또 다른 도전으로 이끌었다.
‘투수가 장갑 끼고 공 던지는 것 봤나?’
엉뚱한 질문 같았지만, 맨손으로 던지는 투수의 공은 아주 빠르게도 때로는 급격한 변화구로 타자를 돌려세운다. 맨발은 걷고 달리기에 있어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점이 있다고 확신했다. 첫날 동네 뒷산을 내려오면서 함께 협업하는 발과 발목, 종아리와 허벅지가 아주 부드럽고 매끄럽게 충격을 흡수하는 느낌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거의 매일 맨발로 걷고 달렸는데 그때마다 숲이 전해주는 느낌이 달랐다.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았다. 눈이 오고 빙판길이어도 걷고 뛰고 싶었다.
오감이 깨어나면서 ‘색다른 즐거움’에 눈을 떴다. 단순히 열정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동네 뒷산이 작게 느껴졌고 더 멀리 더 높이 맨발로 오르고 싶었다. 신발을 신고 달리거나 산을 오를 때 와는 전혀 다른 강렬한 열정이 피어났다.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떠올리며 맨발 걷기에 몰두했다. 어느 날은 양평 용문산 가섭봉(1,157m)을 오르고 내려왔고, 또 어떤 날은 치악산 비로봉(1,208m) 정상에 섰다. 힘드네 하면서도 설악산 대청봉(1,708m)도 넘었다.
폭풍 성장기라고 말할 수 있었다.
성장은 곧 행복이라는 말이 맞았다.
맨발로 자연을 걸으며 나를 살피는 시간도 많아졌다. 게으르고 나약했던 나의 과거와 달리, 나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