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동네 한 바퀴 산책하는 것이 소확행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다.
청바지를 벗어 내렸는데 발가락에 이물감이 있어 내려보니 왼쪽 엄지발가락이 반쯤 얼굴을 디밀고 나와있다.
순간 30년도 넘은 오랜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다지 공부에 취미를 들이지 못했지만 유독 영어는 재미있어했다. 딱히 기억할만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다른 과목은 대충대충이었는데 영어만큼은 상대적으로 자랑할만한 성적이었다. 그렇다고 100점 만점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고...
그땐 신경가소성이 최고조여서 뭐든 보면 외워버리기 쉬웠다. 수능성적이 발표되는 이맘때쯤이면 공부 꽤나 해서 9시 뉴스 인터뷰를 하는 엄친아들의 이야기 중 교과서 페이지를 사진 찍듯이 암기해 버린다는 그런 기괴한 공부법이랄까. 문법이나 숙어를 암기하는 게 아닌 페이지를 통으로 이미지저장하고 예상문제와 답을 통으로 이미지저장하고...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나이이다. 욕심부려 억지로 하나를 외우면 두 개가 빠져나가 버리니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 해도 훌륭하다고 할까.
2학년 담당 영어선생님은 체구가 컸고 그 덩치에 잘 어울리게 얼굴도 큼지막했으며, 머리가 벗어졌지만 온화한 얼굴이었다. 대개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밉보이면 얄궂은 별명으로 불렸는데, 영어선생님은 그냥 영어쌤이였다. 기억하는 몇 명 쌤들의 별명은 '베토벤(음악쌤), 개떡(수학쌤), 날라리(국어쌤)' 이 양반들은 나를 포함한 학생들이 참 싫어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그날 영어쌤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앞자리 둘째 줄에 앉은 내 눈에 단번에 확 띄어버린 빵꾸난 양말 사이로 내민 엄지발가락
나의 추측이라면 학교 출근 후 구두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을 것이고, 옆자리나 지나가던 누군가가 알려줄 수 도 있었겠고, 교실로 이동 중 평소에 달리 머리 내민 엄지발가락의 청량함을 느꼈음직한데, 구멍 난 양말을 신은 채로 우리 교실로 들어오신 것이다. 아니 댁에서 출근을 준비하던 때 이미 알았을 수도 있을 텐데... 어쨌든 내 눈에는 영어쌤의 평소 이미지로 볼 때 매우 검소하신 분이구나. 아~ 존경스럽다. 저렇게 검소하신 분이니 촌지와는 아예 거리가 멀었겠고, 학생을 때린다는 건 더욱 상상할 수 없는 분이었다.
이런 영어쌤의 영향이었을까. 다른 과목에 비해 월등한 내 영어 성적은 2학년으로 끝이었고, 3학년에는 영어쌤이 교감쌤으로 승진되어 나와는 더 이상 스승과 제자가 되지 못했다. 그 이유였던지 영어성적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뒤에서 1,2등 하는 정도로...
"쌤 저 아직도 열심히 영어공부합니다. EBS 왕초보생활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