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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쿠로스 Nov 03. 2024

여행 1일차 샌프란시스코, 출장이 아닌 여행의 묘미

여행 1일차, Dr.구의 탄생


2023년 말, 나는 29년간의 월급쟁이 생활을 끝마쳤다. 그리고 떠나는 첫 해외여행. 출장이 아니라 여행이며 그것도 친구인 현암과 떠나는 여행이라 더 없이 설랬다. 우리는 인천공항에서 만나 체크인을 마치고 라운지로 향했다. 10여 년 이상 속세를 떠나 있던 현암은 과거 전 세계를 누비던 상사맨이었다. 하지만 중생시절의 기억은 이미 저 멀리 사라졌는지 그는 인천공항의 무인시스템에 감탄을 연발했으며 라운지의 와인에도 더 없이 행복해 했다. 우리는 10시간의 긴 비행 동안의 꿀잠을 위해 라운지에서 와인을 꾸준히 마셔줬다. 로드트립이자 어쩌면 알콜트립이 되기도 한 이번 여행에서의 음주는 인천공항에서 낮 1시에 이미 시작되었다.


인천에서 토요일 오후 4시 출발한 우리는 시차 때문에 하루를 벌어 샌프란에 토요일 오전 10시30분에 도착했다. 시차적응의 관건은 도착 당일 저녁까지 안자고 버티는 것이었는데 이를 위한 비행기에서의 꿀잠 도전은 나나 현암이나 모두 실패했다. 오늘 밤까지 앞으로 남은 12시간을 50대 중반의 몸뚱이들이 버텨줄 수 있을까? 로드트립을 위한 체력과 정신력과의 싸움이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마중 나온 석헌과 조우했다. 불과 3개월 전 여름 서울에서 헤어졌는데 샌프란에서의 만남은 또 달랐고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도 들었다. 샌프란에서 토,일 이틀간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오전 출발하는 일정이라 일단 샌프란 투어에 들어갔다. 샌프란 투어라 함은 보통 금문교, 피셔맨즈워프, 유니온스퀘어 등 잘 알려진 관광스팟들이 있다. 하지만 50대 아저씨들의 투어는 달라야 했다. 특히 샌프란 주민과 함께하는 여행은 일반적인 관광객들과 같을 수 없었다. 


호텔 체크인 전 우리는 두 곳의 바를 가서 맥주를 마셨다. 파인트 각 한 잔씩만. 석헌이 자주 가는 단골 바들이라 그런지 현지인의 느낌을 갖기 충분했다. 


난 지난 5 년간 샌프란 출장을 몇 번 와서 그때마다 석헌과 갔던 곳이지만 샌프란이 초행인 현암은 계속해서 감탄했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바를 한 곳 더 간 후 이번 여행의 중요인물을 만나기 위해 한식주점 도요새(Toyose)로 향했다. 도요새는 샌프란 외곽에 위치한 포차컨셉의 한식당으로 한인 관광객은 거의 없고 주로 K푸드에 관심 있는 현지인들이 주로 가는 곳이다.



이번 여행에서 아주 주요한 역할을 맡은 이는 바로 석헌의 중국인 동거녀 S다. 동거녀라고 하면 한국어로는 뭔가 부정하고 음습한 느낌이 드는 단어인데 PC(Political Correctness)의 천국인 샌프란에선 혼인신고만 안 했을 뿐 부부와 다름없는 사이로 인정받는다. 석헌은 S와 2002년 교수부임을 같이 하며 만난 동료교수 사이인데 2008년부터 동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석헌이 종신교수(Tenure)를 받은 반면 그녀는 이를 받지 못해 현재 직업은 없는 상태로 둘은 샌프란에서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이번 우리의 로드트립을 들은 그녀는 여행에서의 어떤 역할을 자원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여행의 헤드쿼터로서(HQ) 여행 중 묵어야 할 도시 결정과 호텔예약, 근처 맛집추천 등을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정보공학(MIS) Ph.D가 여행의 여정을 짜주고 마치 비서처럼 예약까지 해준다? 그것은 매우 반갑고 고마운 일인 한 편 매우 미안하고 면목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미 나랑은 두 어번 본 사이긴 하지만 그리 친하지 않은 입장에서 그녀처럼 고급인력이 그런 미천한  일을 대신 해준다는 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에 애매모호해 하는 우리에게 석헌은 의외의 말을 던졌다.


‘S도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보내는데 오히려 그 일이 2주간 활력이 될꺼야. 그리고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보람도 느낄거고. 원해서 한다는 일이니 그냥 고맙다고만 해’


그렇게 S는 우리 로드트립의 또다른 멤버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예우를 갖추기 위해 우리는 그녀를 그녀의 중국 성을 붙여 정중히 ‘Dr.구’라고 부르기로 했다.


Dr.구와 도요새에서 6시에 만난 우리는 첫날의 마지막 4시간을 견디기 위해 술을 마셨다. Dr.구가 맥주보다는 독주를 좋아하신다는 첩보를 접하고 우리 중 유일한 소주러버인 내가 그녀와 대작을 자원했다. 인천공항 라운지의 와인에서부터 샌프란의 도요새까지, 이미 30시간 이상을 깨 있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차라리 소주라서 막판 스퍼트가 더 가능했던 듯 싶다. 


모레가 출발인데 아직 첫 도착지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샌프란에서 멤피스까지 직선거리로 2,100마일, 30시간 이상 걸리는 여정이었지만 아직 모든 것이 미정이었다. MBTI가 J인 나로선 더 없이 견디기 힘든 상황인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Dr. 구를 충분히 신뢰했다. 내일 저녁도 샌프란에서 같이 식사하기로 되어있어 내일 저녁 우리 첫번째 여정이 정해질 예정이다.


9시 조금 넘어서까지 도요새에서 소주를 마시고 나와 현암은 호텔로 돌아가 곯아 떨어졌다. 그렇게 첫날의 시차적응 미션은 완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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