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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엉 May 28. 2024

우라질 년을 위한 저녁식사

진짜 독립하려고 했는데 1


낮잠을 잘 자고 일어난 시간이 저녁 7시였다. 거실로 나와 소파에 거꾸로 누워 L자 다리를 하고 머릿속으론 저녁으로 뭘 먹을까를 궁리한다. 아까 카페에서 먹다가 남겨온 쿠금빵(쿠키+소금빵)이랑 우유로 간단히 때워야지, 생각을 마쳤다.


엄마가 벌게진 얼굴로 안방에서 나온다.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한참 들리더니, 머리를 다 말리고 나오느라 또 열이 올랐나 보다. 저녁쯤 머리를 감는 건 그녀의 오랜 루틴이다.


“오랜만에 짜장면 시켜 먹을래?”


엄마가 물었다.


“짜장면. 웩.”


30대 여성이 짜장면은 땡기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방식이다.


“아우 엄마 요즘 계속 짜장면이 땡기는데~”


“혼자 시켜 먹어”


“한 그릇만 시키기는 미안하단 말이지~”


여기까지 나오면 어쩔 수 없다.


“나 그냥 빵이랑 우유로 간단하게 먹으려고 했어.”


내 계획을 말해주는 수밖에.






아직 정서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부모로부터 제대로 독립하지 못한 30대 여성인 나는, 꼴에 ‘독립적인 저녁식사’를 하길 원한다. 그래서 내가 어떤 저녁식사를 할지 부모에게 숨긴 채 방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낮잠을 늦게까지 자서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먼저 저녁을 먹어버리게 하거나, 그들이 싫어하는 메뉴 혹은 혼자 먹을 수밖에 없는 구성을 공표해 알아서 따로 저녁을 드시게 하기도 한다.


오늘은 후자를 선택했다.


“간단히? 그럼 엄마도 간단하게 해치울까? 너 빵이랑 떡도 먹을래? 파프리카랑 방울토마토 해서?”


오늘은 잘못 걸렸다.






엄마가 “너 어쩌구랑 저쩌구 먹을래?”라고 하는 것은 “어쩌구랑 저쩌구를 내오렴.”이라는 말이다. 내가 “좋아.“ 대답했더니 역시 ”오늘은 네가 좀 차려올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여전히 L자 다리를 풀지 않은 채로 싫다고 했다. 왜냐면 나는 진짜 쿠금빵이랑 우유만 간단히 먹을 생각이었고. 간단한 저녁식사를 위해 갑자기 파프리카랑 방울토마토를 씻어서 썰고 떡을 전자레인지에 돌려올 생각까진 없었으니까.


“우라질 년. 지 엄마는 더워서 뒤지는데!”


엄마가 씩씩거리며 주방으로 갔다. 수십 년간 자식들 앞에서 ‘말은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은 곧 그 사람이 하는 말이다.’ 하며 교양을 유지했던 그녀는 갱년기를 지나며 욕주머니를 오픈했다. 욕도 안 하기엔 너무 괴로운 시기인가 보다.






한참을 궁시렁대며 칼소리를 내던 엄마가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먹어! 하길래 아직도 소파에 거꾸로 누워있는 채로 쫌이따~ 했다.


“사진 안 찍어?”


엄마는 내가 맨날천날 사진을 찍는다는 걸 안다. 그 사진들 어따 쓰냐고 타박하면서도 기다려준다. 갑자기 그게 고마워서 드디어 소파에서 일어났다.



우라질 년 사진 찍으라고 또 이렇게도 예쁘게 담아왔다 울엄마.


갑자기 고마운 맘이 솟았다.


“사진 찍게 기다려줘서 고마워.”


별 거 아닌 말 같아도 저렇게 교과서 같은 감사인사를 가족에게 하려면 얼마나 속으로 되뇌고 연습하고 뱉어내야 하는지 아는가. 우라질 년 뭐 이쁘다고 저렇게 예쁘게 저녁식사를 차려온 엄마가 고마워서. 속으로 몇 번 곱씹고 입밖으로도 진짜 말했다. 잘했다.



떡을 먹다보니 쿠금빵같이 너무 단 디저트류는 당기지 않았다. 엄마는 ‘역시 떡보단 빵이네’하며 드셨다.


원래 소금빵 안 좋아하면서.. 치.


툴툴거리는 소리를 하면서도 속으론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예뻤다. 딸 나이 30대쯤 되고 부모 나이 60대쯤 되면 이런 건가. 맛있다고 잘 드시는 모습 보면 그걸로 흐뭇하다.






배부르게 간단 건강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로 어제 썰어놓은 수박까지 먹고 기분 좋게 통을 들고 일어났다. 싱크대 가서 뚜껑에 맺힌 물들 털고 닫아야지.






“그 그 뚜껑 그거 물 털고 닫아.”






“아아ㅏ아아아악!!!! 나도 하려고 했다고!!! 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잔소리에 발작버튼 눌리는 건 눌리는 거다.










* 안녕하세요!

1일 1버리기가 아닌 글로는 처음 인사드립니다 :)


30대 여성 한 명이 60대 남성 한 명과 60대 여성 한 명으로부터 경제적/정서적/물리적 독립을 이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상.


이라고 포장하고 싶지만 실상은 아빠엄마의 쓰잘데기 없는 부부싸움과 나의 지랄염병 일상을 담는 일기입니다.


에피소드가 생길 때 종종 찾아올게요!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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