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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바람 Dec 05. 2024

시티라이트 City Lights

찰리 채플린 Charlie Chaplin


시티 라이트 (City Lights)
감독 찰리 채플린
출연 버지니아 쉐릴, 플로렌스 리, 해리 마이어스, 알랜 가르시아, 행크 만, 찰리 채플린
제작 1931 미국, 86분

1. 막이 오르면 쇼가 시작된다.
- 채플린 쇼의 개막(開幕)

  이 영화의 첫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 시장(市長)이 새 동상에 씌워진 막(curtain)을 벗기자 사람들은 거대한 동상의 무릎에서 태평하게 잠들어 있는 찰리(채플린)를 발견한다.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난 찰리는 자신이 수십 명의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능한 한 빨리 동상에서 내려오려 시도한다. 하지만 그의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은 장내 사람들을 더욱 집중시키며 행사를 방해한다. 이때 카메라는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 맞추어 움직이며 음악과 음향효과 또한 희화(戱化)적인 그의 행동을 강조시켜 준다.

이 첫 장면만 보아도 채플린에게 있어 미장센(mise en scène )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가를 알 수 있다. 그에게 있어 미장센이란 극 안의 찰리(채플린)의 움직임, 동선을 중심으로 한 조명, 소품, 등장인물의 배치를 말한다. 아니, 이 말은 사실 정확하지 않다. 다시 말해 채플린의 영화에서 미장센이란 ‘찰리’(채플린) 그 자신이다. 바로 그 자신이 영화 속의 미장센 그 자체가 되며 그 외에 소품과 조명 사운드는 그 주인공을 받쳐주는 보조적인 요소일 뿐이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막이 타인에 의해 걷어지며 등장하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영화 속에서는 새로운 동상을 위해 씌워진 막이지만 이것은 영화적 효과로서 채플린의 등장을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한다. 마치 연극 무대 위 배우의 첫 등장처럼 이 장면은 채플린 쇼의 개막(開幕)을 알린다.

무대 면막(面幕)’이라고도 하는 무대막(stage curtain or house curtain)은 무대와 객석을 시청각적으로 차단하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선이라고 한다. (중앙일보 2008.12.20 기사- 무대막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 참고) 바로 그 경계를 넘어 채플린이 등장하는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채플린에게 있어서 미장센의 의미와 무대막이라는 소품을 통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 광대는 미녀를 좋아해!

  이어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거리의 모퉁이 장면이 나온다. 정차해 있던 자동차의 한쪽 문을 열고 들어가 다른 문으로 나온 찰리가 만난 사람은 바로 꽃 파는 소녀(버지니아 쉐릴)이다. 첫눈에 반한 그는 그녀가 가엾게도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꽃을 사고, 그녀에게 동전을 쥐어준다. 앞을 못 보는 그녀는 그가 자동차를 가진 근사한 신사라고 오해한다. 그녀의 오해로 인해 찰리는 의도하지 않게 부자행색을 하게 된다. 떠돌이 가난뱅이인 그가 부자행색을 함으로써 그들의 로맨스는 처음부터 아슬아슬 줄타기를 한다. 금방 들킬 것만 같은 그의 어설픈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웃음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그것은 그들의 로맨스가 결코 순탄치 못할 것을 예고한다.

여기서 찰리가 정차해 있던 자동차들의 문을 열고 거리를 가로지르는 장면은 상징적으로 읽힌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어 등장한 찰리가 이번엔 산업자본주의의 상징인 자동차 속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위트와 유머를 넘어 기존의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일종의 조롱과 풍자로 보인다.   

 
3. 비극적 상황 속 희극 그리고 위로!

 시간을 흘러 밤이 되고, 찰리는 술에 취해 강가에서 자살하려는 남자를 보게 된다. 방랑자 찰리는 술에 취해 자살하려는 한 남자를 구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곧 두 명이 순서를 바꿔가며 물에 빠져대는 소동으로 바뀌며 폭소를 유발한다. 이 장면에서는 익살맞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끊임없이 반복되며 상황의 비극성을 희극적으로 탈바꿈시킨다. 이것은 찰리 채플린의 철학과 인생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역설적이지만, 한 편의 희극을 창조함에 있어 그 희극성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이용되는 것은 비극성이다. 희극성이라는 것이 반항적인 태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일 것이다. 전지전능한 자연 앞에 선 우리의 미약함을 발견하고 취할 수 있는 대처수단이란 웃음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면 미쳐버리고 말 테니까.” 이렇듯 그의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의 이면에는 항상 현실의 어두운 그림자와 떨쳐내기 힘든 비극의 질곡(桎梏)이 서려있어 애수(哀愁)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 슬픔과 어둠을 치유하고 달래려는 그의 바쁜 몸부림은 우리에게 큰 위로로 다가온다. 우리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고 이겨낼 수 없는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여유와 희망이 있기에 이 땅을 딛고 살아갈 수 있음을 채플린은 말하고 있다. 이렇게 희비극의 쌍곡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채플린은 특유의 뒤뚱대는 바쁜 몸부림으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걸으며 관객을 웃고 울게 만든다.

 
4.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리고 환상!

 찰리가 구해준 남자는 백만장자였고, 그 남자는 호탕하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찰리를 위해 차를 선물해 주기도 하고 멋진 레스토랑에 데려다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 다음 날 아침에 술에서 깨어난 그는 어젯밤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를 집에서 내쫓아 버린다. 여기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신분차이와 함께 아침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쉽게 깨져 버리는 환상(幻想)을 보여준다. 그 깨져버린 환상은 술만 먹으면 다시 찰리를 기억하는 남자의 의해 더욱 혼란성을 띤다. 이것은 아마도 그 당시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막연한 환상과 아침이면 또다시 실감하는 현실의 비루함을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루한 현실을 잊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쨍하고 해 뜰 날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필요하지만 이 환상은 아침이면 예외 없이 찾아오는 비루한 현실 앞에 또다시 쨍하고 깨지고 만다. 그래서 환상과 현실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찰리의 모습은 바로 그 당시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희망을 놓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의 처절한 모습과 닮아 있다.

 
5. 현실이라는 사각의 링! 그 위의 광대!

 꽃을 파는 소녀의 눈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찰리는 복싱을 하게 된다. 거대한 내기와 도박의 경연장인 이곳에서 그는 시종일관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상대방을 조롱하고 관객을 우롱한다. 이것은 산업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조롱과 풍자이다. 그리고 사회적 권력과 자본주의라는 힘에 쉽게 쓰러지지 않는 가난한 자의 저항과 반항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폭소 뒤에 진한 눈물을 남긴다. 바로 현실의 쓰라린 상처를 담은 눈물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마음을 서글프게 하는 슬픈 시름을 담고 있는 이유이다.


6. 행복한 결말의 모순(矛盾)

 백만장자의 도움(?)으로 꽃 파는 소녀의 수술비를 마련하지만 그는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가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그녀와 길에서 재회한다. 그녀의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그녀가 하는 장사는 번성하고 있다. 채플린은 즉시 그녀를 알아본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목소리와 손의 감촉이 전부인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녀가 쇼 윈도를 통해 보는 것은 한 사람의 떠돌이, 사회적 추방자의 우스꽝스러운  형상뿐이다. 그가 길에서 주운 그녀의 기념물인 장미의 꽃잎이 하나둘씩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녀는 그를 불쌍히 여기게 되고, 그의 열정적이고 절망적인 응시는 그녀의 동정심을 일으킨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누군지 알지 못한 채 거리로 나가 그에게 새 장미 한 송이를 주고 그의 손에 동전 한 닢을 쥐어 준다. 첫 만남에서 서로 교환되었던 바로 그 장미와 동전. 바로 이 순간, 그들의 손이 만날 때, 그녀는 그 감촉으로 마침내 그를 알아본다. 그녀가 묻는다. "You?" 채플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눈을 가리키며 묻는다. "You can see now?" 그녀는 대답한다. "Yes, I can see now." 소녀는 시력을 되찾아서 세상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를 도와준 사람(찰리)의 실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아~! 찰리를 부자로 믿었던 소녀가 그의 온갖 노력으로 눈을 뜸으로써 그들의 관계는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이 눈물겨운 패러독스(역설)는 웃음 속의 슬픔, 환상 속의 현실과 현실 속의 환상을 동시에 일깨운다. 그래서 이 모호한 결말 앞에 관객들은 행복한 결말의 모순을 느끼게 된다. 절대 이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의 거리, 그리고 현실에 눈뜸으로써 종말을 고하는 환상의 정체를 말이다. 슬라보예 지젝에 의하면 이 영화는 "영화사를 통틀어 마지막 장면에 모든 것을 거는 영화의 가장 순수한 사례"(『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할리우드의 정신분석』, p.30)이다. 클로즈 업 된 채플린 웃음은 여태껏 정신없이 달려온 그의 행보에 마침표를 찍으며 복잡한 감정의 폭풍 속으로 우리를 잡아넣는다. 그래서 이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다. 허망하게 끝나는 현실 속 달콤한 환상을 잡고 놓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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