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서크가 1955년에 만든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은 1950년대 미국 중산층 계급을 중심으로 그 안에서 자신의 욕망과 사회적 신분사이에 흔들리는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950년대 미국은 승전국의 풍요를 만끽하던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대였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으며 중산층은 성장했고 빈부의 격차는 더욱 커졌으며 신분에 따른 문화와 삶의 양식 또한 철저히 구분되었다. 이 영화는 각기 다른 신분의 남녀가 만나 갈등을 빚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개인적 욕망의 실현의 어려움과 좌절을 통해 사회 내 가부장적 질서의 부조리함과 아이러니 그리고 가족의 가치와 여성의 위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층적이고도 사회적인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는 가부장제적인 가족 가치가 여성을 가정으로 불러들이고 틀 안에 고착화시키려 시도했음이 드러난다(반면 남성은 남성성을 지켜야 한다). 주인공 캐리 스콧(제인 와이만 분)의 모습이 거울이나 창틀 같은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화면들과 어둡고 차가운 빛의 조명 아래에 서 있는 부분들이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억압 아래 놓여있는 여성의 모습을 양식적으로 보여주는 부분들이다. 또한 캐리가 자신 보다 하층민인 정원사 론 커비(록 허드슨 분)와 사랑에 빠지자 가족과 친구들이 캐리를 못마땅해하는 부분들은 보수적인 미국 중산층의 폐쇄적인 일면을 드러내며 그럼에도 론을 선택하는 캐리의 모습을 통해 그에 저항하는 여성-주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캐리의 저항이 성공으로 끝났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이야기를 점철했던 각종 우연과 억지스러운 설정은 캐리와 론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결말도 갑작스러운 봉합으로 매듭짓는다. 이와 같은 결말은 관객들에게 멜로드라마의 환상성, 즉 비판적 거리 두기의 자세를 견지하도록 하며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실이라는 반성적 성찰을 통해 모순된 현실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에서의 가정은 이처럼 미국 중산층으로 대두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모순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더글러스 서크는 자신의 작가적 특색으로 이 영화의 스타일을 다채롭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펼쳐진 토대는 그가 살폈던 50년대 미국 사회의 문제점들이었다.
이 영화의 색채와 연기를 그대로 반영하여 만든 토드 헤인즈 감독의 2003년 작 < 파 프롬 헤븐>은 '동성애'와 '인종차별' 문제를 집어넣어 사회적 해석을 확장시킨다. 영화 내 표현 (쇼트 배치와 미장센 그리고 연기까지)
또한 너무나도 더글라스 서크의 그것과 닮아있다.
대조적인 장소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화면구도, 화면을 자연스레 분할하여 등장인물을 배치시키는 장면, 특이한 조명의 사용, 화려한 의상의 활용과 화면 색감의 사용, 그리고 등장인물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건물과 장소의 선택. 이런 스타일적 측면은 다층적 해석을 가능케 하는 요소이자 그 스타일 자체로 영화의 매력적인 힘이 되는 더글라스 서크 감독의 것이다.
허나 토드 헤인즈 감독은 의도적으로 마치 고전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듯배우들의 연기마저 50년대 스타일의 과장됨과 상투성이 드러나게끔 연출해 낸다. 이때 케이시 역을 맡은 배우줄리안 무어는 단연 돋보이며 작품에 우아함을 더한다. 마치 잘 짜인 안무와도 같은 절제된 행동과 시선처리. 신파적 요소를 클래식하게 만드는 그녀의 연기는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절정을 이룬다.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의 결말은 표면적으로 캐리가 결국 사랑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지만, 파자마 차림으로 무력하게 누워있는 론과 그를 간호하는 캐리의 모습은 남성중의적 시선을 유지한 채 사회적 터부를 해피엔딩으로 봉합한 것으로 읽힌다. 그저 여성을 가정 내 역할(어머니와 부인)을 수행하는 보조적 역할에 위치시키며 기성 질서 안에 묶어두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창밖의 수사슴은 가부장적 시선이자 경고로도 읽힌다. 허나 '파 프롬 헤븐' 결말은 기차역에서 레이먼드와의 이별로 마무리된다. 이때 그저 손 인사 하나로 관객의 마음을 빼앗는 줄리안 무어의 매력이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캐리와 달리 캐시는 회색빛 도시에서 홀로 새빨간 의상을 입은 채 걸어간다. 표면적으로 캐시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색깔, 즉 주체성을 찾았다.( 친구와의 대화 속 '레드'를 기억해 보라) 레이먼드에게 자신을 남편의 성이 아닌 '캐시'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장면 또한 어떠한 신체적 접촉 없이도 농밀하고도 상징적인 장면이다.
소설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람이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건,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동시에, 외부세계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라고 했다.
이제 캐시는 '유리의 방'에서 탈출한 것일까? 아이들을 데리고 자동차를 타고 어디로 갈까? 분명한 것은 그녀는 마음먹은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