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잉마르 베리만 출연: 거너 본스트랜드, 벵 에커로, 닐스 포프, 막스 본 시도우, 비비 앤더슨, 잉가 길 개봉 1957 스웨덴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 속에 담긴 철학적 의미들에 대한 고찰
1. 영화의 줄거리와 배경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가 돌아온 안토니오스 블로크는 흑사병이 만연하여 죽음의 땅이 되어있는 고향 스웨덴의 해변에서 죽음의 방문을 받는다. 자신을 '죽음'이라고 소개한 그에게 블로크는 체스 내기를 하고, 죽음은 그에 동의한다. 승산이 없는 내기에서 정말로 블로크가 원하는 것은 체스가 진행되는 동안 신으로부터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이다. 죽음으로 끝나게 될 삶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기사는 교회를 찾아가기도 하고, 마녀로 낙인찍힌 소녀 옆을 지키기도 하지만 어디에도 '죽음'만이 보일 뿐, 신의 구원을 찾을 수 없다. 기사는 오히려 광대부부와 미카엘이라는 이름의 아이를 보며 잠시 충만한 평화를 느낀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 동행을 자처한 기사는 자신의 시종, 예슨과 그를 따라나선 여인과 일행을 이루어 길을 떠난다. 일행에 대장장이 아내 리사가 합류한다. 그러나 밤에 죽음과 체스를 두는 기사를 본 광대부부는 황급히 떠나고, 남은 일행은 비바람을 피해 들어간 성에서 기사의 아내 카린을 만난다. 그들 모두에게 죽음이 찾아오고 기사는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올리지만 죽음에게 정복당한다.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이 만들어진 것은 1957년의 일이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은 쇠퇴기를 이미 지나고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한 무리의 청년 비평가들이 누벨바그의 전조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영국에서는 프리시네마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도 더 이상 신을 말하지 않았고, 유럽이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고 있었으며 대중문화의 중심은 고통의 세대에서 전후세대로 옮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물결처럼 보였다. 그때 베리만은 전혀 뜻밖에도 신의 존재와 부재에 대해서 질문했던 것이다. 이 질문은 '제7의 봉인'의 시대배경이 중세인 것만큼이나 중세적인 질문으로 보인다.
2. 영화 속 상징과 의미들
1) 등장인물 #기사와 종사(從士)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기사의 죽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의 죽음이 암시하는 것은 ‘중세의 종언’이라 볼 수 있다. 즉, 기사 계급에 의해 지탱되던 중세의 종말을 한 기사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죽음과의 싸움과 패배를 통해서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사와 종사(從士)가 겪는 모험이라는 설정의 밑그림에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어른거리기도 한다. 특히 기사 계급의 몰락을 통해서 중세의 저녁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돈키호테와 연관성을 가진다.
차이점이라면 베리만의 작품은 돈키호테의 성격을 전복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풍차를 향해 무모하게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환상에 대한 용기를 블로크에게서는 내면에 자라는 죽음에 대한 투쟁으로 바꾸어서 주인공을 돈키호테형이 아니라 햄릿형으로 전도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내면적 싸움의 빛이 닿는 부분은 어디인가? 그 빛이 떨어지는 초점에 중세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근대적 자의식'이 있다. 바로 주체는 믿음에 근거한 것인가 하는 문제.
#광대들
이 영화에서 떠돌이 광대들의 생활은 이 영화 주된 내용인 블로크와 죽음의 싸움과 함께 이 작품의 다른 축을 이루고 있다. 광대는 곡예사이며, 흥이 나면 노래를 짓는 음유 시인이다. 작가는 이 광대의 삶에 주목하고 있는데, 중세에서 시인/재주꾼들은 예술가로서 당시에는 농민보다 더 천한 기층 계급이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작가가 광대에게 오랫동안 눈길을 주는 것은 예술가만이 볼 수 있는 환상(vision)의 능력에 구원의 가능성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광대 부부의 삶이 귀향하는 기사의 내면 풍경과 곳곳에서 교차하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1/3을 죽인 페스트가 뒤덮고 있는 공간에서 광대의 모습은 일종의 낙원처럼 보인다. 그래서 유희하는 존재로서의 인간(호모루덴스)으로 구원의 가능성을 내 비치고 있다. 한편 낙원에서 광대들이 노는 동안 기사와 종자는 교회당에서 벽화를 그리는 화가와 대화를 나눈다. 화가는 ‘죽음의 꿈’을 그린다고 말하며, 왜 그렇게 서두르냐고 묻자 ‘죽음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이것은 죽음의 공포에 위협받고 있는 중세적 인간들을 나타내고 있음과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통해 민중들이 교회에 의지하게끔 했던 기독교 이데올로기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또 이것은 중세 예술의 특징과도 연관이 있는데 예술이 인간에 공포를 자아내게 하는데 기여한 것은 중세 예술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블로크의 내면적 고민과 영화의 주제
종자가 화가와 대화하는 동안 블로크는 예배당 안쪽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가서 선다. 이것은 햄릿의 독백 장면을 연상시킨다. 중세 햄릿이 근대적 자의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소 이상한 점은 원래 중세 전성기의 예수 모습은 근엄함과 엄격함 그리고 위엄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 보통이다. 이 시절 예수의 모습은 비잔틴 양식의 권위주의적 장식성과 신성함, 범접할 수 없는 차갑고 초월적인 모습으로 대부분 그려져 있다. 그런데 영화 속 주인공 블로크가 본 예수상은 중세 말에 나타나는 예수의 아이콘(Icon)으로 십자가상에서 극도의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이다. 이것은 무너져가는 중세의 괴로움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블로크는 고해성사를 요청받는다. 그의 고해성사는 사실 지독한 신성 모독을 담고 있다. (여기서 베리만은 불가지론자적인 성격을 담아낸다.) 이때 고백의 공간을 빈 거울에 비유하는 데, 빈 거울에 드러난 주인공의 내면세계는 신 살해의 의지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유령에 사로잡혀 산다.'라고 고백한다. 유령은 신앙의 강제에서 오는 것이다. 고해받는 신부는 그에게 묻는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대답한다. '나는 신앙(Belief)이 아니라 지식(Knowledge)을 원한다. '
#중세적 고민과 근대적 철학
플라톤은 Belief와 Knowledge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에게서 Belief는 신앙이 아니라 감각적 지각/상상력을 말한다. 즉, 지식은 참된 앎에 이르게 한다고 말한다. 이때 믿음과 지식은 서로의 근거가 된다. '알기 때문에 믿는다.'는 주지 주의적 신앙인데 기독교 정신이 도그마화 되면서 상호 근거의 관계가 "믿기 때문에 안다 " 로 변하게 된다.
즉, 신앙이 인식을 규정하고 신학(종교)이 과학을 지배한다. 중세 후기부터 근대 초기까지 과학자들은 탄압받았다. 그래서 완강한 중세의 도그마 속에서 행한 블로크의 고백은 신앙보다 지식(앎/인식)을 원했던 것이다. 그의 고백 속에서 '인식'은 신에 대한 살해를 의미한다. 여기서 니체의 실존주의, 앎으로 이어질 수 있다. 즉, 블로크의 신-살해 의지로부터 니체의 선언까지가 서구의 근대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점에서 이 영화는 중세적 질문으로 시작하여 근대적 철학으로 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고백 속에는 근대인들의 고통도 예견되어 있다. 신이 사라진 인간의 대지는 삶의 무의미성(Meaningless)에 노출된다. 신이 존재하면 죽이고자 하고 신이 부재하면 삶은 덧 없어진다. 여기에 아이러니한 근대인들의 어리석음이 있다.
중세 유랑극단은 민중 예술을 대표한다. 여기서 짐승 흉내 내기는 중세의 지배 계급을 풍자하고 권력에 대한 웃음이 대부분 풍자의 내용이다. '희극'은 대개 당대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민중들을 대상으로 풍자로 웃기는 마당 한가운데로 중세의 불길한 종교적 행렬이 진입한다. 향 연기는 죽음을 쫓아내는 연기이면서 죽음 자체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악마의 소행이라는 도그마로 페스트를 쫓아내기 위해 교회에 운집하여 오히려 페스트는 확산되었다고 한다.
화가가 벽화를 그리는 장면은 고행 행렬 속에서 서로 채찍질하는 모습인데, 이것은 평타고행(고통 속에서 속죄)을 뜻한다. 신앙이 잘못 강제한 어리석음 속에서 노정되는 일종의 Masosaddism(피학자학증)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장면에서 성가와 함께 계속해서 비명이 들리는데, 이것은 민중의 생활상의 고통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세의 질곡에 허덕이는 민중의 비명) 신앙에 짓눌려 있는 중세인들은 민감한 감수성과 천진난만함이 특성이며 사소한 일에 쉽게 감동하여 눈물을 보인다. 하지만 순진한 믿음은 동시해 위험성을 띠는데 기독교와 다른 이들 모두 이단이라 칭하고 정죄한다며 화형에 처하게 한다. 이때 유명한 설교가들은 민중적 스타이며, 지방 유지들은 유명 설교가들을 환대한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의 이미지를 재현한다고도 볼 수 있다. 설교가가 나타나면 민중은 눈물 흘리며 자발적으로 회개한다. 이때 설교가는 민중을 짓누르는 공포이며, 공포에 대한 공공연한 예약이 종말론이 된다. 종말론은 14-16세기 유럽 대륙 강력히 지배하였는데, 페스트는 종말론의 가시화라고 설교한다. 블로크는 이러한 광란의 집단 히스테리를 관찰한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민중의 광란과 같은 강도로 죽음이 날뛰고 있다.
(마녀 소녀와 블로크의 대화)
소녀 :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요?'
블로크 : '악마라도 만나고 싶다' 왜냐하면, 악마가 존재한다면 신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악마는 신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악마는 신의 존재를 보증해 준다. 그의 악마를 만나고 싶은 욕구는 신의 존재를 알고 싶은 욕구이다.
소녀 : '내 눈을 바라보라'
블로크 : '아무도 없다 '
소녀 : '등 뒤를 보라'
블로크: '등 뒤에도 없다.'
악마마저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블로크에게 마지막 절망으로 다가온다. 마녀는 근대적으로 해석하면 일종의 정신병자로 볼 수 있다. 지나친 죄의식의 결과로 강박관념 지속되어 → 정신분열이 생기고 자아가 찢겨 나 아닌 것으로 생각되고 나 아닌 것으로 행동하는 것(Depersonalization/신들림)을 마녀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시절 마녀는 의인화된 악령의 거처로 믿어져 불태워 추방시켰다. 블로크가 화형식에서 목격한 것은 악마가 아니라 소녀의 공포(Terror)였다. 그리고 도둑이 된 신학자 또한 페스트에 걸려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영화의 결말에서 주인공 일행은 블로크의 성에 도착한다. 그의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죽음'의 방문을 받는다. 블로크는 '죽음'과의 체스 게임을 가능한 연기시켜 '죽음'이 발견 못하도록 하려 하지만, 끝내 '죽음'을 떼어낼 수 없자, '죽음'을 자기 성으로 유인해 광대 일가족을 살리고 자신과 일행은 희생당한다. 결국 광대의 가족만이 유일하게 죽음으로부터 탈출한다. 환상을 볼 수 있는 광대는 '죽음'까지 합쳐 7명이 죽음의 어두운 동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광대 가족은 반대편 빛이 있는 밝은 쪽으로 걸어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아마 베리만은 구원을 종교적 믿음의 고민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유희적 존재인 광대에서 찾은 듯하다.
3. 정리 및 맺음말
영화 제7의 봉인은 신에 대한 처절한 부르짖음이다. 신을 불러도 신이 오지 않는 사회, 그러나 필연적으로 만나는 죽음에서 주인공은 신에게 질문하고 매달린다. 그러나 그를 감싸는 건 무언無言이고 죽음의 그림자며 형식이 의식을 압도하는 썩어버린 종교의 피상뿐이다. 그가 보는 종교의 현실은 썩어있고 그들의 신은 죽어버렸다. 그는 종교의 해악을 신의 실체를 추구하고 제멋대로의 논리로 해석하는 인간들의 물질성으로 해석해 낸다. 베리만에게 신은 존재로 얻어지지 않는다. 오천명에게 빵과 물고기를 먹인 기적은 재현될 수 없다. 기적이 없는 시대에 신이 살아남기 위해선 실체 없는 초월적인 정신,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늘 침묵하는 신을 위해 침묵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과 춤을 추고 일상의 소박함과 해맑은 웃음을 탐닉하는 베리만은 결국 종교인으로서 자신의 처절했던 존재의 고민과 어설프게나마 타협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