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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바람 Dec 16. 2024

인간이 되고픈 천사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1. 제목


1987년 작 ‘베를린 천사의 시는 빔 벤더스 감독의 대표작이자, 87년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원제는 ‘Der Himmel über Berlin(베를린의 하늘)’이며 영어제목은 ‘Wings of Desire(욕망의 날개)’인데, 일본 개봉 당시 제목이 ‘ベルリン・天使の詩(베를린 천사의 시)’로 우리나라엔 일본개봉 이후 한참이 지나서 들어왔기에 이 제목 그대로를 썼다고 전해진다.



 2. 오프닝


  영화는 베를린 도시 위를 내려다보는 천사의 시각인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 한 것으로 시작한다. “알스 다스 킨트 킨트...” 의 거의 독백에 가까운 내레이션. 다소 우울하고 건조한 듯 하지만 낭만적 정서와 함께 관객을 사유의 세계로 이끄는 듯한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카메라의 앵글 변화와 인물의 등장만으로 풍부한 정서와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


전쟁 기념 교회 탑 위의 두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 그들이 하늘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빌딩 숲과 거리 풍경, 바쁜 인파 속에서 어린아이들 시선으로 지상에서 올려다본 구름 낀 하늘이 몽타주 기법으로 교차 편집되는 장면은 시선과 이야기, 그리고 정서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다미엘이 타인의 마음을 읽듯 카메라 또한 대상과의 거리를 통해 정서를 표현해 낼 수 있음을 말해준다.



3. 허구와 리얼리티!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고 다층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인물은 영화 속에서 배우 역할로 나와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피터 포크이다. 콜롬보로 유명한 그는 주인공 다미엘의 심적 변화를 일으키는 존재이자 작품 내에서  액자식 구성으로 자신의 영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영화 스토리는 2차 세계 대전 직후 독일 출신 미국인의 의뢰를 받은 사설탐정 '피터 포크'가 베를린에 와서 의뢰인의 동생의 자식을 찾는 내용이다. 영화 속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허구, 픽션과 리얼리티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가상의 플롯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일분단의 상황과 당시 역사적 사실들을 설명하고 상기시킨다. 픽션, 이야기는 역사를 반영할 뿐 아니라 감각적으로 사실을 일깨우고 그 기록은 후세에 남아 영원성을 획득한다. 허구와 리얼리티는 마치 삶과 죽음처럼 엮여있다.

죽음이 삶을 감각적으로 상기시키고 한 생명은 죽음으로서 타인의 기억으로 영원성을 획득하듯이 우리에게 이야기는 단지 허구가 아니다. 감각적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처럼 다가온다. 천사들이 도서관에 사는 이유는 이것이며, 더 이상 시를, 이야기를 읽지 않는 인간을 슬퍼하는 이유이다.



3. 영원에서 감각의 세계로의 투신!


  다미엘은 고단한 삶에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 사이로 우연히 가짜 날개를 달고 천사라도 되는 듯 공중그네를 타고 있는 한 여인, 마리온을 유심히 바라보다 그 여인의 마음을 읽게 된다. 그리고 그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이 만남을 통해 다미엘은 감각의 세계로의 진입을 소망하게 된다.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고 느낄 수 있는 세계. 단지 바라보고, 모으고, 증언하고, 확인하고,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세상 안으로 들어가 감정을 껴안을 수 있는 세계. 여기서 이 영화는 지각을 넘어 감각으로의 투신을 꾀한다.


'인간이 한없이 재밌어졌다. 얼어붙은 여행이 녹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되찾았다. 누구에게나 빙점은 있다.

인간의 빙점을 녹이는 것은 인간의 체온이다.'

<후지와라 신야 의 동양방랑>


이제 인간이 된 다미엘은 새빨간 피를 흘리고 피를 맛보고 색을 구분하고 커피 향을 맡고 타인의 손을 잡는다. 이때 영화 또한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며 다미엘이 느끼는 감각을 관객에게 전이시키려 한다.


이 영화를 기독교적 가치(죽음은 또 다른 영생)와 낭만주의적 러브스토리로 1998년도에 리메이크 한 작품이 '시티 오브 엔젤'이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어찌 보면 베를린 천사의 시와 '반대접점'에 있다. 시티오브엔젤은 죽음이란 불가해하고 불가피하며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분이며 죽음 너머에도 영생이 있다고 말한다. 허나

베를린 천사의 시는 죽은 감각을 일깨우며, 삶이란 단지 보고 엿듣고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눈앞에 당신이 서 있듯 지금 온몸으로 생생히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밖에 나와서 햇빛을 쬐는 기쁨
  해가 비칠 때
  사람들 눈에서 보이는 위안
  믿을 수 없어 난 이제 혼자가 아니야
  다시 태어난 느낌이야
  정말 미칠 것 같아
  마침내 평화를 얻었어

- 베를린 천사의 시-


4. The End 가 아닌 To be continued의 의미


  이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의 특징과 관객과의 관계를 묘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 않은가? 관객은 다미엘처럼 단지 눈앞의 영상을 바라보고 정보를 모으고 타인에게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함으로써 그 영화를 보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나. 그 허구와 환영의 세상은 단지 시청각적인 감각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실체가 없어 만지고 느낄 수 없는 세상이 아닌가. 그래서 영화를 보는 관객은 다미엘이 마리온에게 이끌리듯 그 환영적 세계의 유혹을 받아 만지고 껴안을 수 있는 세상으로 진입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미엘이 하늘에서 추락하여 자신의 실체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얻듯이 관객 또한 객석에 앉은 실체를 버리고 그 영상 안으로 진입하여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때로는 나의 영원한 정신적 존재가 지겨워. 더 이상 영원한 시간 위를 떠도는 게 아니라… 매 순간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지금’, ‘지금’, ‘지금’이라고 말하고 싶어.” 이 다미엘의 대사는 관객들이 환영적 감각을 넘어 실체를 느끼고 싶어 하는 소리는 아닐까?


다소 과잉 해석일 수 있으나 영화라는 환상에 기꺼이 투신하여 감각의 실체를 얻는 데 성공한 사람들, 바로 이 영화가 기꺼이 찬사를 보내는 감독들 : 오즈 야스지로, 프랑수와 트뤼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들이 전직 천사인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이야기가 이어지듯 삶 또한 계속된다.

영화는 그러한 이야기를 '영원'한 이미지로 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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