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1월, 오클라호마의 연구소에서 아기 침팬지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님 침스키. 허버트 박사의 프로젝트를 위해 강제로 어미와 이별한 후 스테파니의 집에 맡겨져 ‘인간의 아이’처럼 길러진다. 스테파니의 딸 제니와 함께 성장한 님은 언어 교육을 위해 허버트 박사 연구팀의 로라에게 맡겨지고 수어를 통해 기본적인 단어들을 배우며 놀라운 능력을 선보이지만, 어느 새부턴가 종종 거센 힘을 휘두르며 침팬지의 야성을 드러낸다. 실험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허버트 박사는 프로젝트를 중단, 님을 오클라호마 침팬지 연구소로 돌려보내는데...
#리뷰
인류의 조상, 침팬지
인류의 오랜 조상인, 영장류 침팬지. 유전자가 99% 가 같다는 이 동물은 말만 못 할 뿐이지 인간과 꼭 닮아있다. 그래서인지 많은 과학자들은 이 동물을 가지고 인류의 근원과 진화단계, 혹은 인류의 특성을 밝혀내려고 애써왔다. 허버트 박사 또한 침팬지에게 과연 언어를 가르칠 수 있는가 하는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아기 침팬지를 데리고 와 실험을 한다. 그런데 생명을 다루는 실험이 늘 그렇듯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뒤늦게서야 이 실험이 비윤리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이 실험의 비윤리성을 밝혀냄과 동시에 이 실험의 결과와 예상치 못한 모습까지 보여주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동물보호 이상의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 인간의 특성과 오만함
허버트 박사는 많은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침팬지과 인간과 아주 유사한다는 점에 매료된다.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며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표현할 수 있으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무엇보다도 인간과 언어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그가 놓친 것은 그것이 침팬지가 인간과 닮은 점이 아니라 모든 동물들이 행하는 본능적 움직임이라는 점이다. 곧 그는 그의 실험이 실패임을 깨닫는다. 침팬지는 몇몇 단어를 외워서 필요할 때마 수어를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룰 뿐 그것은 문장을 만드는 능력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는 진정 침팬지와 교감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저 관찰자였기에 그 교감의 과정들이 단순한 손의 움직임이 아니라 여러 몸짓과 표정 그리고 수만 가지의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실험이 실패한 진짜 이유는 (나중에 밝혀지는데) 그가 그저 침팬지가 지닌 인간의 유사성에 관심을 가졌을 뿐 침팬지의 특성과 습성에 전혀 관심을 안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영화는 아기 침팬지 님을 양육한 여러 보호자(사육사가 아닌 부모역할을 한 보호자)들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이 보호자들을 보며 부모의 여러 유형과 역할에 대해 생각할 수 있으며, 양육이라는 그 친밀한 관계 속에서 수반되는 사랑과 미움, 그리고 그 언저리의 다양한 정서들을 느낄 수 있다. 성년이 다 된 침팬지에게 얼굴을 물려 더 이상 두려움에 침팬지에게 다가가지 못한 한 보호자는 그 느낌이 꼭 '나쁜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기분'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다른 보호자는 여자친구와 지내는 시간보다 님과 함께한 시간이 더 좋았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사실 소통이란 인간만이 가진 언어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몸짓과 표정으로 진정 교감할 때 가능한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 영화는 보여준다.
#부모라는 역할과 한계
님의 첫 번째 보호자였던 스테파니는 님을 침팬지가 아니라 정말 자신의 아기라 생각하고 키운다. 심지어 모유까지 먹이며 자신의 아기와 함께 뒹굴고 생활한다. 그러다 허버트 박사가 자신과 님을 떼어놓으려 할 때, 크게 반발한다. 그녀는 그때서야 우리 안에서 울부짖던 님의 어미의 심정을 이해한다. 이 영화는 실패한 과학적 실험을 통해 꼭 부모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 물어보는 듯이 구성되어 있다. 님이 거쳐간 다양한 보호자들과 그들이 행한 진실된 노력들. 하지만 결국 나쁜 결과로 이어진 행위들. 첫 번째 보호자였던 스테파니는 진심으로 님을 자기 자식처럼 돌보지만, 님은 사람이 아니기에 침팬지의 특성을 내보인다. 체계적이고 냉정하지 못하고 그저 자식들과 뒹굴며 키우는 방식은 애정은 가득 찼지만 지식과 방법이 모자란 방식처럼 보인다. 그녀의 방식은 애정과 사랑만으로는 자식을 제대로 훈육할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 같다. 과연 부모의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한 보호자는 완벽히 님과 소통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님을 동물실험소에 곳에 뺏기게 된다. 그는 어떤 점이 부족한 부모의 유형일까? 우리 주위에 흔한 부모는 사실 허버트 박사와 같이 자녀가 지닌 재능과 그것으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희망에 눈먼 부모는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부모의 한계는 어쩜 한 생명을 잘 돌볼 수는 있어도 그가 지닌 특성까지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점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