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나이가 존재하긴 할까?
마흔 중반이 되면서 상갓집에 갈 일들이 슬슬 늘어간다.
죽음이라는 막연한 일이 점점 실체로 다가오며 커지는 느낌이 들 때면 한 번씩 죽으면 어쩌나? 언제 죽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이내 답이 없음으로 다른 일에 몰두한다.
열심히 있는 신앙은 아니더라도 "기도하기!"라는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으로 많은 위안을 받는 나로서는 신앙이 없는 남편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당신은 죽는 거 무섭지 않아?"
현재 50 초반. 정년퇴직을 10여 년 앞두고 있는 신랑의 대답은
"글쎄. 지금 죽으면 당신이 많이 힘들 거고 10년 뒤부터 면 괜찮을 것 같은데?"
외벌이로 초등 아이들 셋을 키우고 있으니 신랑이 지닌 가장의 무게가 가볍지 않음은 짐작이 가는 바이지만 그것이 죽음의 나이를 정할 만큼 이 사람에게 무거운 건가? 하는 질문으로 내게 되돌아왔다.
대체 세상에 존재한지도 모르고 30년을 넘게 살다 만나 아이들을 낳았다는 이유로 인생 후반의 대부분과 죽음의 가능여부를 타진할 정도가 되는 인연이라니 부부, 부모라는 단어가 무섭게도 느껴진다.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라는 노래가사는 있는데 죽기 좋은 나이, 죽어도 되는 나이는 과연 있기나 하냔 말이다.
어떤 분의 백수연을 일부러 찾아간 적이 있었다.
요즘 평균 수명이 아무리 늘었다 한들 100세의 생일을 맞이하신 분을 실제로 뵙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직접 지인이 아님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동행했던 기억이 있다.
백수연의 주인공이셨던 할머니도 딸은 먼저 하늘로 보내고 백수연은 할머니가 키웠던 외손녀의 주도하에 진행된 잔치였다. 그 이후 소식은 들은 바 없이 10년이니 아마도 하늘에 가셨으리라 짐작은 되나 마음속 한편 조금 불편하셨던 거동 그대로 잘 살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되기도 한다.
살지 않았다면 죽지도 않을 것이다.
살아오다 보니 죽음에 가까워져 가는 것이지만 아직은 죽음이라는 것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늘의 단조로움이 내일도 계속되길 바라고 그럴 것 같고.
신생아중환자실에서의 죽음도 요양병원에서의 죽음도 어느 하나 사연 없는, 아쉬움 없는 죽음은 없다.
애당초 죽기 좋은 나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다만 매주 읽어주는 동정란에 너무 젊으신 분의 부고 소식을 전할 때면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평소와 달리 좀 더 숙연한 분위기가 된다고 느껴진다.
46살 이제 반은 넘게 살았다. 이후는 얼마만큼인지 알 수 없지만.
드문드문 한 번씩 중간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 본다.
죽어도 좋을 나이는 내가 알 수 없지만
죽어도 큰 문제(?) 없는 상황을 내가 만들어 두려고 노력할 순 있으니까.
아마 신랑이 말한 10년의 유예기간도 비슷한 맥락일 거다.
그 때면 아이들이 대학교에 입학할 법적으로 성인이 되는 때.
나도 내 나름의 준비를 해 둬야지. 잘 정리하는 것. 차근차근. 새롭게 받은 내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