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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리 Jul 03. 2019

[월간 안전가옥] 6월 by Hayden

#월간안전가옥 #일터 

곧 자리는 날 거예요. 

[월간 안전가옥] 6월 by Hayden


이번 달, 제가 공간에서 한 일을 떠올려 보자면 이렇습니다. 아메리카노 만들기, 도서 등록하기, 화장실 휴지 채우기, 도서전 지원 나가기, 창고 정리하기, 설거지하기, 쓰레기통 비우기, 간혹 메일 보내기, 원두 주문 넣기, 핸드타월 구매하기, 머신 청소하기, 어쩌다 한 번 외부 미팅하기, 기획서 쓰기, 다시 아메리카노 만들기, 자몽에이드 만들기, 레모네이드 만들기, 재고 파악하기의 반복.


아마 저의 친구들이 제가 한 일의 목록을 보면 당장에 이렇게 말할 거예요. 너 거기서 뭐하냐. 그럼 제가 할 답은 이겁니다. 일해.


친구들이 정말로 제가 여기서 뭘 하는 줄 몰라서 물은 그것은 아니라는 걸 압니다. 네, 아주 잘 알지요. 저도 가끔 제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럴 때일수록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럴 때가 어떤 때인지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이럴 때’란 내 자리를 찾을 수 없을 때, 내가 뭘 하는 것인지 모르겠는 때입니다.


실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모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을 들여다보자고요. ‘내가 뭘 하는 건지 모르겠어’라는 말은 ‘내가 하는 짓이 의미가 있는 짓인지 모르겠어.’ 아니면 ‘이 일이 이 회사에 얼마나 기여하는 것인지 모르겠어.’ 일 거예요.


얼마 전 어느 미디어 스타트업 대표님과 점심을 먹으며 나눈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새 90년대생 입사자들이 늘어 벌써 과반수를 차지하다 보니 그 친구들에 대한 무수한 보고서(밀레니얼 세대와 함께 일하기 뭐 이런 종류)와 그들을 둘러싼 선입견과 마주한다고요. 그리고 자신이 90년대생 구성원들에 대해 느낀 점을 읊어주셨습니다.


90년대 생을 둘러싼 루머 중 가장 지독한 것은 이거예요. 그 세대는 회사보다는 내가 중요하다는 것, 워라밸을 중요시해서 칼퇴가 안 되는 회사는 꺼린다는 것. 그런데 그렇지 않다더군요. 누구보다 회사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요. 다만 공통점은 있다고 합니다.


‘회사의 비전과 내가 하는 일이 제대로 얼라인 되어 있는가?’

‘내가 하는 일이 회사에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는가?’

‘내가 하는 일이 회사에도 의미가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거. 그리고 이 질문이 일하는 데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 실은 굉장히 현실적인 거 아니겠어요? 자신이 사자인 줄 알고 센 주먹 한 번 휘두를 때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매일 조금씩 때려서 거대한 바위 어디쯤 내가 만든 균열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태도 말이에요.


그저. 기여하고 싶은 거지요. 이왕에 고생할 거라면 제대로 된 곳에 내 힘을 쓰고 싶은 것이고요. 그렇잖아요. 찌를 거면 정곡을 찌르고 싶고, 정곡을 못 찌르면 그 주변이라도 공략하고 싶은 거.


대표님이 구성원과 면담에서 하는 일은 그들이 하는 일과 회사의 비전, 그 사이를 자알- 연결해주는 작업이라더군요. 물론 그건 타이름이나 눈속임이 아닙니다. 일을 신나게, 지속해서 해나가기 위해서는 회사 대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이 작업을 해줄 필요도 있으니까요.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향후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 것인지, 그것이 결국 회사에 얼마만큼의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 그건 회사의 성공에 나의 지분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앞서 말한 밀레니얼 세대는 ‘내가 중요한’ 세대인 것은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네요.


많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회사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느낄 때 저는 세 가지를 기억하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제 경우에 해당하지만 말이에요)


한 번 하기로 한 건 일단 한다. 끝을 보기 전에 계속 방향 전환하지 않는다. 적어도 ‘으른‘이라면 내 감정에 따라 어떤 일을 (시작할 수는 있어도) 관두어서는 안 된다. 이게 저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어떤 상황을 못 견디겠다는 마음이 드는 건, 그 상황이 정말로 못 견딜 정도로 최악인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때가 많지요. 예상해본 그 모든 난감한 상황을 감당하겠다고 마음먹은 후라면 그 상황을 타개할 마음이 생기거나 버틸 여유가 생기고요.

이직을 결심했을 때, 저는 다음 직장이 몇 가지 기준에 부합하면 그 직장은 좋은 직장이라고 ‘믿자’고 마음먹어요. 그 기준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방향을 전환하는 데에 힘을 쏟는 것은 어리석다고도 생각해요.

이건 회사에서 하는 사소한 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어떨 때는 그 일의 성패와 관계없이 끝을 보는 것 자체가 중요할 때도 있어요. 다만 그 일을 하는 주체가 나 혼자 일 때는 별 문제가 안 돼요. 그저 나 하나만 설득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팀원 모두가 달려들었을 때는 그 일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끝을 보는 것’이 중요하지요. 끝까지 해서 함께 성공하거나 함께 실패하는 것. 일을 완수하는 것. 그래야만 다음에 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믿어지’거든요.


‘잘-못-못’ 아니고 ‘잘-못-잘‘이다. 잘하다가 못했을 때 그 일의 결과가 못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잘하다가 못했어도 결과는 잘한 것으로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니, 제 의도를 정확히 말하면 그 ‘일이 우리에게 보여준 마지막 모습‘에 속지 말자는 거예요.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요, 남을 욕하면서 친해진 사이는 그 씹힐 거리가 되어준 ‘남’이 사라지면 그 관계도 더는 유지가 안 돼요. 언제까지고 그 표적을 찾아 헤매게 되지요. 부정적인 대화로 이어진 사이는 계속 그 부정적인 대화가 아니면 어색해져요.

일을 하다 보면 잘하다가 마지막에 삐끗해서 망치는 일이 있잖아요. 그런데 객관적이랍시고 앞서 잘한 것까지 못 한 것으로 덮어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그럼 그것은 우리에게 실패한 일이 되어 버리지요. 그 일을 회고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실패를 회고하게 되는 거지요.

어떤 분들은 숫자에 입각해야 한다고, 그 회고가 설사 뼈 때리는 수준의 회고라고 할지라도 감당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일이라는 게. 결국은 일도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닌가요? (전 그렇던데)


이건 첫 번째 원칙과도 연결될 텐데, 당장 고민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정확히 말하면 고민하는 것 자체가 괴로운 문제에 대해서는) 분기에 한 번 혹은 연말에 한 번 하자. 그게 나를 위한 예의다.

스스로 어떤 기회를 더 주려고 노오력하기보다 어떤 경우에는 그 고민 자체를 자주 들추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숏텀으로 고민해야 하는 일도 있지만 어떤 고민은 어떤 결실을 보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있어요. 그걸 구분하지 못하고 죽 끓는 냄비 들추듯 하는 것은 오히려 내 에너지를 허비하는 일이기도 해요. 에너지를 쓸 일이 아닌 곳에 쓰지 않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배려이자, 예의지요.


내 자리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지하철 자리 차지하듯이 엉덩이 들이밀어서 거기가 내 자리가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도 지하철 자리를 차지할 때도, 일터에서 내 자리를 찾을 때도.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는 열차인지만 확인되면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요. 서서 가도, 거기 잠깐 내 자리가 없어도 일단 가긴 가니까요. 무책임한가요? 아닐걸요. 대신 열차가 데려다준다고 열차만 믿고 가다간 큰코다친다는 거. 열차가 엉뚱하게 흘러가지 않도록 눈을 크게 뜨는 거. 그건 필요하죠.


잘못 올라탄 것만 아니면 돼요. 그럼 됐어요. 곧 자리는 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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