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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리 Aug 09. 2019

[월간 안전가옥] 7월

숨을 고르는 여름 #일하는사람

긍정을 짜내기 참 쉽지 않은 여름입니다. 가끔 정신없이 비도 오고요. 햇빛은 뜨겁다 못해 목을 죄는 것 같습니다. 불쾌지수라는 말. 해가 갈수록 무뎌지는 말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갈수록 자기 틀이 강해지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온난화로 날이 점점 뜨거워지기 때문인지. 불쾌지수를 여실히 느끼는 여름이 낯설기만 합니다. 


저는 요즘 부쩍 제가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을 떠올립니다. 부천 영화제에서 마케팅 팀에 소속한 디자이너로 일하던 때였습니다. 계절도 딱 이맘때였어요. 영화제의 마케팅팀은 외부 회사들과 콜라보레이션이 굉장히 많은 부서입니다. 업무 협약도 하고, 협찬사의 필요와 영화제 내부의 필요를 가늠해 제안서를 보내고, 효과적인 이벤트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들을 하지요. 음료수며 기념품이며 갖가지 협찬품도 굉장히 많아서 영화제 창고는 거의 마케팅 팀의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어요. 영화제를 한 달 정도 앞두면 협찬품들이 마구 도착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창고에 정리해두어야 합니다. 영화제 기간 동안에는 협찬품들을 영화제 곳곳에 잘 배부해주기도 해야 하고요. 그러려면 자원활동가 친구들과 함께 너나 할 것 없이 무거운 박스를 나르고, 정리하고. 또 정리하고. 나르고, 정리하고. 이런 일들을 반복해야 해요. 

영화제를 100일 정도 앞두면 듀 데이트 카운트다운에 들어갑니다. 그때부터는 어떤 일정도 뒤로 미룰 수가 없어요. 끝마치지 못하면 영화제 어딘가에 구멍이 나거든요. 당연히 스태프 모두가 과도한 업무와 더운 날씨에 치여 날카롭고 싶지 않아도 날카로워지는 순간이 종종 생기곤 합니다. 지금에 와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참 많은 부분에서 미숙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때야말로 일의 기본 중에 기본을 배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에 저는 영화제 전과 후, 두 가지 모드로 업무의 전환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스태프가 일인이역을 해야 하지요. 저는 영화제 개막 전까지는 디자인 업무를 하고, 그 외 시간에는 마케팅 팀원으로서의 업무 지원을 해야 했지요. 사회 초년생이나 다름없었던 저는 일은 곧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업무가 달라지는 것은 일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고, 일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은 나의 태도 중에서도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디자이너는 초기 기획단계에서만 의견을 조율하면, 대부분 혼자 작업하고 혼자서 일정 관리를 하면 되었지만, 마케팅 팀원으로서는 대부분 타 팀에 요청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자료를 요청하기도 하고,  크고 작은 협조 요청을 해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박스 나르는 것을 도와 달라는 요청도 해야 했어요. 소위 아쉬운 소리를 하거나 죄송해야 하는 포지션이 된 거지요. 처음에는 그것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안 그래도 바쁘고 힘든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거나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 되는 건 정말 난감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어떡하나요? 저이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 일은 할 수  없는 일인걸. 그런데 일이라는 게 얽히고설켜 있어서, 이번에 저희가 아쉬운 소리를 하면 반드시 한 번은 저쪽에서 우리에게 부탁할 일이 생겼어요. 일하는 사람은 끝까지 도도할 수가 없는 겁니다. 참 희한하죠. 그때 알았던 것 같아요. 일을 하다 보면 반드시 한 번은 죄송할 일이 생기는구나. 섣불리 멋진 척하면 안 되는구나, 불친절해서는 안 되는구나. 이런 아주 기본 중에 기본이요. 


한 번은 영화제 홍보팀에서 어느 극단과 협업해야 하는 일의 pm이었는데요, 극단 대표님이 자꾸만 약속한 미팅 시간을 안 지키는 겁니다. 사실상 명백히 극단 대표님의 잘못이었어요. 약속한 시각에 안 나타나셔서 전화를 걸어보니 어젯밤을 새워서 못 올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시간 약속은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어요. 회의를 할 때마다 찜찜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치 언어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기분이랄까요? 내 뜻이 저쪽에 잘 전달된 것일까? 저쪽에서 온 말은 과연 내가 이해한 것이 맞을까? 이런 의심과 함께 불안이 생겼지요. 이야기할수록 계획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부분 부분 성긴 채로 넘어가는 기분. 그때야말로 일에 있어서 소통은 중요한 것이며, 소통이 안 되는 것은 고통이라는 것을 느꼈었지요. 


요즘 부쩍 그때 생각이 듭니다. 소통. 결국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어쭙잖은 미사여구로 오염시키지 않고 전달하는 능력이 아닌가 하고요. 혹은 평소 줄곧 갖고 있던 (감정이 혼재한) 생각이 아니라 그 상황에 필요한 아주 중요한 말만 고르는 능력이 아닌가 하고요. 또는 앞으로 내가 구성원들에게 죄송할 일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신중하게 말하는 태도가 아닌가 하고요. 일하면서 실수 한 번 안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난날 나의 태도와 말을 벼르는 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소통이 원활치 못해서 생기는 고통은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소통에 실패한 내가 힘들다고 느끼면, 그 실패한 소통의 상대방도 똑같이 힘든 거지요. 소통은 쌍방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같이 실패한 겁니다. 내가 말을 잘 고르지 못해서 상대에게 실패를 안긴 것과 같아요.


틈만 나면 날씨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계절이니, 이런 생각이 올여름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럴수록 마음을 다잡아야지요. 일을 하는 사람은 우아하기만 하긴 어려우니까요.


--


여름 조심하세요, 여러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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