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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리 Jan 10. 2020

[월간 안전가옥] 12월

어딘가 틀림없이 흐르고 있을 시간을 보여주는 일 | #일하는사람

영화 <백두산>을 봤습니다. 친구가 이 영화의 스태프로 참여했거든요. 친구는 이 영화 작업이 끝난 후 거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채, 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밀려오는 회의감에 못 이겨 무기력했습니다. 그는 벌써 이 영화를 세 번이나 봤다고 했습니다. 언제 또 내가 만든 영화를 세 번이나 볼 일이 있겠냐면서요.


‘언제까지 할 거냐.’


저는 종종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친구는 이번 거까지만. 그다음에도 이번 영화까지만.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 일이 내 일’이라고 말하는 대신 작업한 영화를 한 편씩, 묵묵히 쌓아갔습니다. 저는 ‘언제까지 할 거냐.’는 말을 더는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날을 기억합니다.

영화 만드는 일. 검정 화면을 타고 올라가는 무수한 이름들. 저는 그 이름들을 볼 때마다 그 이름 뒤에 펼쳐져 있는 시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친구가 그 시간을 보여줬거든요.


영화 만드는 일과의 마지막 순간이 ‘거의 다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친구. 같은 영화를 보려고 세 번이나 영화관을 찾았던 친구를, 올라가던 자기 이름을 보고 있었을 친구를 떠올립니다.


뭐 어쨌든. 영화 <백두산>을 봤습니다. 좋았다, 나빴다를 말할 것은 아니고요, 그저 영화를 보며 들었던 생각을 쓰려합니다.


백두산이 터집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 핵폭탄을 터뜨려야 합니다. 그 임무를 맡은 대원의 임신한 아내는 출산을 앞둔 상태입니다. 이 영화는 이 세 개의 시간이 만나는 영화입니다.


폭탄이 터지는 영화는 폭탄에 붙어있는 타이머가 열연하기 마련이잖아요. 사령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타이머를 누릅니다. 그렇게 빼도 박도 못 하는 시간이 시작됩니다.


주인공이 시간에 쫓기는 영화는 유독 그 시간이 늘었다가 줄었다가 하는 것을 관객이 체감하며 보게 되는데 (어쩌면 제가 영화를 보면서 현재의 시각을 확인하며 보는 탓일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폭발까지 30분 남짓 남았지만, 인물들은 작별 인사를 하고, 마지막 당부를 하고, 크고 작은 실랑이를 합니다. 이것이 영화 속 시간이지요. 늘었다가 줄었다가, 한 갈래로 가던 시간이 저쪽의 시간을 보여줌으로써 두 갈래 혹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저는 <백두산>을 보면서 이 영화 <백두산>이 아니라 ‘영화’라는 것, 영화의 시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영화는 나의 시간이 아니라 어딘가에 틀림없이 흐르고 있을 누군가의 시간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영화는 그런 기능을 가진다는 것 따위를요. 조금 거창해지자면, 그 이타적인 상상력을 북돋아 주는 것이 이야기의 순기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요.


우리가 살면서 인식할 수 없는 타인의 시간을 영화는 우리에게 아주 충실히 보여주고, 우리 현실의 시간에 겹겹이 그 시간을 쌓습니다. 그 시간의 겹이 두터운 영화는 보고 나면 꽤 큰 피로감을 떠안기도 하지요. 그래서였을까요. 영화를 보고 난 뒤 저는 조금 피곤해졌습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누군가의 시간 속 장면들을 바쁘게 따라다녀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좋았습니다. 영화에 등장한 타이머 덕분에 영화 속 시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서요.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영화 잘 봤어. 영화를 보니까 네가 왜 그토록 지쳤는지 알 것 같더라. 고생했어.’


친구는 다음 영화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누군가는 처음에, 누군가는 마지막에 의미를 둡니다. 그런데 뭐, 무엇도 처음이기만 할 리 없고, 마지막이기만 할 리 없잖아요. <백두산>은 친구의 (세 번이나 찾아본)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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