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릴리에게 감정이입하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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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내용은 철저히 작성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
유명한 책인 거 같은데 나는 처음 보는 제목이었다. 제목만 봐도 '나 스릴러예요~'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책은 오랜만이었다. 원래 범죄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세상에 판치는 범죄만 해도 머리 아픈데, 내가 굳이 문화생활을 향유하면서까지 그런 내용을 접해야 하나 싶어서.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재미도 재미였지만 생각이 많아졌다. 세상에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 존재하긴 할까. 희대의 연쇄살인마, 각종 성폭행을 일삼은 범죄자,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사기꾼 등 뉴스에 나오는 범죄들을 보면 '저 사람은 죽어도 싸'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과연 그게 맞는 말인가. 그렇게 말하는 나는 완전무결한가.
이 책에 나온 릴리는 어릴 적 본인의 몸을 바라보는 쳇의 눈길에서 성적 불쾌감을 느낀다. 그 후에 쳇이 본인의 방에 찾아와 자위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는데, 아주 계획적이고 치밀해서 언뜻 보면 도저히 13살의 범죄 계획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감탄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 절로 감탄이 나왔다. '와, 이렇게까지 계획한다고?'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릴리는 사이코패스인데, 이 책을 쭉 읽다 보면 릴리의 그런 면모를 유추할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 (북마크를 해 두지 않아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살인이라는 행위는 내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증거라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릴리가 본인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저 '사회의 악'인 사람들을, 썩은 사과 몇 개를 신의 의도보다 조금 일찍 추려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생각에 의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브래드 다겟은? 브래드는 왜 죽인 거지? 단순히 테드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게 되어서? 미란다는 에릭과 바람을 피웠다는 이유로 (사실 이것도 살인이 정당화되는 이유에 포함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였다고 치더라도, 미란다와 바람을 피운 브래드는 아무리 생각해도 죽일 이유가 없었다. 이 책에도 나온다. 무고한 사람을 죽인 거라고. 그런데 릴리는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심지어 쳇을 떨어뜨린 우물에 가 브래드를 떨어뜨리며 범죄가 완전히 묻히길 바란다.
내 글을 읽고 이 책을 찾아 읽을 분들이 계신다면 꼭 옮긴이의 말까지 읽어 보시길 추천드린다. 내가 생각해 보지 못한 사고의 폭을 넓혀 주었다. 낙엽을 치워야겠다고 한 일, 갑자기 밤에 릴리의 아빠가 소리 지르며 깬 일이 과연 우연일까,라는 말에서 소름이 돋았다. 뜬금없이 환경운동가처럼 행동하던 엄마도, 설마.... 릴리의 살인 행위를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작가가 이 대목을 집어넣은 이유도 어떻게 해서든 시체를 막기 위한 부모님의 분투라는 걸 알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부모의 사랑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식이 살인자라는 걸 알면서도 숨기고 싶은, 그런 마음은 과연 사랑일까.
지금도 아이러니한 건, 릴리가 밉지 않다는 것이다. 희대의 살인마라고 욕해도 모자랄 판에, 릴리가 밉지 않다니.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건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릴리의 입장에서 쓰인 부분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릴리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 것일까. 이러면 안 되는데.... 싶으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