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전자규 Jakyu Chun
Oct 06. 2024
5. 그 끝을 알 수 없는 동굴 속으로 몸을 던지다
치료의 시작은 우선 몸에 구멍을 뚫는 것부터
- 이 글은 현재 대장암 4기 투병 중인 저의 투병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쓰는 글입니다. 얼마나 자주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몸이 허락하는 대로 자주 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에 오신 나그네 분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생각보다 너무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치료 관련 여러 가지 일이 있었고, 갈수록 줄어드는 체력과 늘어나는 몽롱함, 그리고 계속해서 제 몸에 매달려 있는 통증이 글을 쓰려는 제 의지에 걸림돌이 되네요. 그래도 제정신이 온전히 붙어있는 한, 더 열심히 노력해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12. 앞이 보이지 않는 먹구름 속에서 인생의 지도를 그리다.
암 선고를 받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겉으로는 평온해 보일지 몰라도 속으로는 미국 중서부 대평원을 헤집는 거대 소용돌이처럼 감정이 요동치는 나날이 흘러갔다. 조금씩 주변에 비보를 알리고, 다니던 직장에도 소식을 알리고 병가휴직을 준비했다. 부모님께는 차마 내가 직접 말씀드리지 못하고 누나가 말씀드렸다. 궤양성대장염에게 10년 넘게 괴롭힘을 당했으면 이제 얼추 벗어날 때도 됐다 생각했는데 더 크고 높은 벽이 나타나니, 마음을 가다듬으려 해도 이리저리 요동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
그 며칠 후 아산병원 암통합진료센터 협진이 있었다. 항암을 전체적으로 지휘하는 종양내과 (항암을 주도하는 진료과는 병원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서울대병원은 혈액종양내과에서 진행한다), 방사선 치료를 진행하는 방사선종양학과, 항문 관련 외과수술을 담당하는 대장항문외과, CT와 MRI 등 영상을 판독하는 영상의학과 등 암 치료에 연관된 여러 과의 교수님들이 모여 환자와 보호자에게 현재 상태와 앞으로의 치료계획 등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자리다.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다가 먼저 진료 본 사람이 울면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무슨 얘기를 들었길래 저렇게 울면서 나오는 걸까. 그걸 보자 내 마음속에서도 두려움이 꿈틀거렸다. '괜찮아. 무슨 얘기를 들어도 담담히 받아들이자.' 다시금 스스로의 마음을 굳게 다독였다.
기다림에 비해서 협진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15분 정도? 의사와 간호사 합쳐서 아홉 분이 계셨지만, 주로 얘기를 진행한 분은 종양내과와 대장항문외과 선생님들이었다. 현재 상태야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 설명은 앞으로의 치료계획에 대해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 15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앞으로 내 목숨을 결정지을 치료의 계획이 그려졌다.
13. 총 맞은 것처럼 - 몸에 원래 없던 구멍이 생기다.
치료의 첫 단계는 우선 항문으로 분변이 내려가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직장에 주 병변이 있는데 그곳으로 계속해서 분변이 지나가면 암세포를 자극하여 조직이 덧나 통증이 발생하거나 암이 더 빠르게 증식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분변의 통로를 다른 곳으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똥 (...)이 항문으로 나가야지 그럼 대체 어디로 나간다는 거야?'
답은 바로 장루. 우리가 먹은 음식물은 식도와 위, 소장을 거쳐 대장과 항문으로 내려가는데, 소장을 지나 대장 초입부에서 배 바깥으로 구멍을 낸 후 여기에 주머니를 달아서 분변을 포집하는 것을 장루라고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몸에 구멍을 뚫긴커녕 외과 수술 한 번 받아본 적 없었기에 가급적이면 그런 과정 없이 항암을 진행할 수 없냐고 물었다. 솔직히 수술이 무섭기도 했고. 하지만 성공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장루를 조성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시기에 동의했다.
수술날짜는 바로 다음 주 화요일인 8월 22일로 잡혔다. 생각보다 빠른 진행이었지만, 시간과의 싸움을 벌이는 암 환자 입장에서는 참 감사한 일이었다. 요즘 의료 대란 때문에 온갖 수술들이 밀리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수술 전날 입원해서 준비를 한 후, 당일 아침 8시에 휠체어를 타고 병실을 나섰다. 보호자로 와있던 아내와 웃으면서 수술실 앞에서 "곧 보자"라고 인사한 후 수술준비실에 들어갔다. 나처럼 오전 수술을 위해 내려온 사람이 대여섯 명 같이 있었는데, 하나둘 먼저 들어가고 마지막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한 10분 정도? 이때의 기분은 정말... 사형장에 끌려 나오기 직전의 죄수의 기분이 이랬을까. 몸이 떨리면서 입에서 저절로 주님의 기도와 성모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나왔다. 몸이 떨렸던 것은 비단 한여름에 열심히 돌아가던 에어컨에 의해 식혀진 3층의 공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윽고 휠체어가 수술실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수술대 위에서 의사가 내 이름과 환자번호를 호명하면서 나의 기억은 끊겼다.
약 두 시간 뒤 정신이 들었을 땐 회복실에 있었다. 수술용 전신마취는 마취가스로 하는데 이게 몸의 대부분의 기능을 멈추게 한다. 폐도 예외가 아니라서 폐가 쪼그라들 수 있는데, 마취에서 깼을 때 얼른 심호흡해서 폐를 원래대로 팽창시키지 않으면 쪼그라든 상태로 고착화되어 차후 치료 및 생활에 문제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아직 마취제가 폐 속에 잔류하고 있어서 몸은 계속 잠이 들려고 하고, 동시에 마취가 풀리면서 수술 후 통증이 지진파처럼 밀려온다는 것. 고통 속에서 졸음을 가까스로 참아내면서 심호흡을 하는데, 무려 두 시간 이상 버텨야 한다는 게 절망적이었다.
병실로 돌아온 나에게 고통과 졸음을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아내와 이름도 무서운, 모르핀보다 훨씬 약효가 센 치사량 2 mg 짜리 진통제 펜타닐이었다. 그렇다. 미국에서 코카인 이상으로 사회 문제를 일으키던 그 마약 펜타닐. 물론 내가 맞고 있던 것은 매우 희석한 용액이었고, 기계로 투입량이 조절되어 오남용은 원천적으로 방지됐지만, 뉴스에서나 보던 물질이 내 몸으로 들어오는 곳이 무섭...
던 것도 잠시, 수술 후 통증은 그런 하찮은 두려움에 기대어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통증과 졸음 그 사이의 어딘가에 몸이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자꾸 잠들려는 정신의 닻을 내리기 위해 아내에게 퀴즈를 내달라고 했다. 지리 퀴즈. 갑자기...?
영어라고는 누나가 배우던 윤선생 파닉스 카세트테이프를 옆에서 같이 좀 들어본 게 다였던 내가 아버지의 회사 발령 때문에 네덜란드로 갔던 것이 1993년, 내가 국민학교 2학년일 때였다 그렇다. 나는 국민학교 세대다. 처음에 반 아이들과 전혀 의사소통이 안 돼서 교실 한쪽 구석에 홀로 있던 나에게 그나마 즐거움을 줬던 것이 바로 지도와 각국의 국기가 수록되어 있던 사회과부도였다. 그때부터 각 나라의 이름과 수도를 짝지어 외우기 즐겨했던 나였고, 그래서인지 수술 직후의 몽롱한 상태에서 생각난, 고통과 졸음을 이겨낼 수 있는 유희거리가 바로 지리퀴즈였다 나 스스로 써놓고 보니 참 이상한 사람이네 (...).
이상하면 어떤가. 효과는 생각보다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아프리카 소국의 수도를 맞추는 나, 심지어 나라가 아니라 미국의 일개 주의 수도들을 맞추는 나를 보며 경악하던 아내의 반응을 보는 게 재미있었으니까. 그렇게 두 시간이 무사히 흘렀고, 암과의 사투 그 첫 장이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