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정민 Aug 09. 2024

9. 신(神)과 소통하다?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교집합을 찾아서

플라톤이 저술한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신 또는 정령의 신탁이나 신호를 듣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신호는 일종의 목소리로서 내가 어릴 때 처음으로 들려왔습니다. 이 목소리는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금지하기만 할 뿐 결코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하지는 않습니다. 내게 정치가가 되는 것을 단념시킨 것도 이 목소리입니다.”

공자 역시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고 말합니다. 중용 제1장 “군자는 천도(天道)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경계하고 삼가며 천명(天命)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는 두려워한다. 그것은 은밀한 곳에서 잘 나타나고 미세한 것에서 잘 드러나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조심한다”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중용 제1장은 군자가 홀로 있을 때 조심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명, 하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흔히 신독(愼獨)이라고 하면 남이 보지 않을 때에도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말과 행동을 삼가는 것, 즉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가식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정도의 교훈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중용 제1장은 신독의 목적이 하늘의 명령을 듣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공자가 말한 천명(天命)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하늘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천명(天命)이 바로 천도(天道)인 것입니다. 사람은 이러한 천도, 천명으로부터 잠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에 공자는 “도는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만일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군자는 천도(天道)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경계하고 조심하게 되고, 천명(天命)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명, 천도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천명, 천도는 은밀한 곳에서 잘 나타나며 미세한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러한 이유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천명, 천도를 보고 듣기 위해 삼간다는 것입니다. 구도자(求道者)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속세를 떠나 자연으로 들어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한 곳에서는 천도, 천명이 잘 보이고 잘 들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장 6절)”고 말합니다. 구약 성경 열왕기상 22장에서 선지자 미가야도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보리라(25절)”고 말합니다. 

현대 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고, 현대과학을 맹신하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들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이것을 우리들 내면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라고 설명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내면에 있는 양심이 “그런 일은 하면 안 돼”라고 속삭였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이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불성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견성(見性)이고, 견성하면 성불(成佛)하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양심과 관련하여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성선설을, 순자는 사람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장했습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주장한 홉스 또한 성악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성선설에, 타락 이후의 인간은 성악설에 부합합니다. 성경은 타락 이후의 인간의 모습에 대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창세기 6장 5절~6절), 또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다”라고(시편 14장 3절)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 것에 찬성하십니까? 또 인류의 스승들은 신(神)과 소통한 것일까요, 아니면 내면의 양심과 소통한 것일까요? 

작가의 이전글 8. 내세의 긍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