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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노아 레인 Nov 04. 2024

홍시

즐거운 감 따기

 귀뚜라미가 딸꾹질을 멈추고 나니,

가을바람이 제법 차가워졌다.

오늘밤은 유난히도 바람이 씽씽 불고,

문풍지가 제멋대로 부르는 노래를

 이제 그만 멈추라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바람이 불고 나면, 즐거운 일이 생긴다.

벌써 장독대 옆에선 새로운 오선지 위에 ,

음표가 제멋대로 악보를 만들고 있다.

'툭!'  '퍽!' 아주 둔탁한 소리지만 기분 좋은 소리다.


옆에서 누워있는 언니 또한 자는 척 하지만, 분명

그 소리를 듣고 있을 게다.

아침밥을 짓기 위해 엄마는 일찍 일어나실 테고,

직접 줍는 재미를 느끼게 하기 위해, 엄마는

그대로 놔두실 게 분명하다.

그 기분 좋은 소리와 문풍지의 제멋대로 흥얼거림 사이에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가 잠이 스르르 들어버렸다.


아침이 돼서야 바람소리는 멈추고 ,

벌써 옆자리의 언니는 없다.

눈을 비비고 뒷마당으로 나가니, 언니는 벌써

감나무 밑에 앉아서 홍시를 야무지게 먹고 있다.

내가 나타나자 언니는 홍시 바구니를

엉덩이 뒤로 '쓱' 밀어 넣으면서

"네 것은 저기, 저기에 있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장독대 옆에

 수북이 쌓인 감잎 위에, 빨간 홍시가 감잎 위에 떨어지면서,

한 대 맞아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잖아도 우리 집 감은 일명 '먹시감'이라고

 볼의 일부분이 먹물이 든 것처럼 까만 게 특징이다.

'선비가문'이라서 그런 거일 거라는 아빠의

진지한 표현도 그렇지만,

언니와 나는 달고 맛있으니 그냥 좋았다.

'바스락바스락' 감나무 잎을 밟으며 엉거주춤

홍시를 줍는 내게

언니는 "내가 다 주우려 했는데, 엄마가 네가 줍게 남겨 놓으라 했어"라고 말한다.

엄마는 항상 그렇다. 직접 줍는 재미를 느껴 보게 하기 위해서 그냥 놔둔다.


한쪽 볼이 일그러진 홍시가 혀끝에 닿는 순간, 달콤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너무 좋아서 눈이 저절로 감긴다.

엄마는 부엌문을 열며 "너무 많이 먹으면 아침밥을 못 먹으니 한 개씩만 먹고 들어 오너라!" 하신다.

이때, 뒷동산에서 옆집 수열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수열이네 집도 감나무가 있지만, 그 감은

납작하고 아주 작은 데다 맛까지 없어서

마을의 감나무골에 가서 감을 가져다 먹는다.


나는 얼른 나머지 한 개를 주워서 뒷동산으로 향했다.

수열이는 홍시를 보더니 "한 개 밖에 안 주는 거야?"

약간의 실망스러운 말투로 표현하지만, 난

그 뜻을 잘 알고 있다.

동생이 두 명이나 되니 혼자 먹기 미안해서일 게다.

"우리 엄마가 많이 먹으면 밥 못 먹는다고 한 개씩만 먹으래,

그리고 언니가 바구니를 가져가서 더 이상 못 가져와"

미안해하며 말하는 내게 수열이는 학교 끝나고

홍시를 따러 가자고 한다.


사실 홍시는 낮은 곳에 있으면 따기 쉽지만, 높은 곳에 있으면 속수무책이라서 , 스스로 떨어지기까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수열이는 키도 작고 체구도 작지만, 손끝이

야무져서 뭐든지 잘 만드는 아이다.

대나무의 끝을 칼로 살짝 갈라서, 작은 나뭇가지를

 꽂으면 홍시 따는 건 시간문제다.

나는 홍시 딸 생각에 공부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한달음에 집으로 왔다.

수열이는 학교에 갔다 온 건지 모를 정도로 벌써 와서. 마치 제 집 감나무인 것처럼, 제 키보다

척이나  커 보이는 대나무 장대를 쥐고, 감나무 옆에 의기양양하게 서 있다.


자세히 보니, 감나무 끝에 홍시가 제법 달려 있었다.

수열이는 전부 싹쓸이할 기세로 감나무 가지 사이로, 대나무 장대를 '쓱' 밀어 넣더니,

잡히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홍시를 집는 순간, 홍시가 낙하를 하더니 수북이 쌓인 감잎 위로,

'퍽'하며 먹물이 든 한쪽 볼이 일그러진다.

"아! 뭐야!" 순간 수열이의 입에서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순간은 내가 한 살 누나지만 다 필요 없다.

"보고만 있으면 어떻게?" 화를 내며 앙칼지게 쏘아붙인다.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빛의 속도로 눈 깜짝할 사이에 떨어지는 홍시를 받아 낼 제간이 없다.


차라리 감꽃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이 편할 것 같다.

감꽃은 떨어지면  떨어진 데로 멋스럽고,

명주실에 꿰어서 목에 걸고 다녀도 참 예쁘다.

유난히 감나무가 많은 우리 마을은 감꽃이 만개하면, 동구 밖에서부터 꽃향기가 반긴다.

특히 '고욤나무' 꽃은, 그 크기가 아기 손톱만 하게 피는데, 너무 귀여워서 가느다란 실핀에 꿰어

머리에 꽂으면, 못생긴 여자아이도 예쁘게 보인다.


'고욤나무' 열매는 비바람에 잘 떨어지지도 않아서,

서리가 내린 후에 따서 먹으면, 그 쫀득쫀득한

맛이 일품이다.

하지만, 씨가 너무 많아서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하다가, 있는 힘을 다해 '훅' 하고 뱉어낸다.

아이들은 고욤나무 아래 나란히 앉아서 '고욤나무 씨를 누가 멀리 보내나' 놀이를 하기도 한다.

고욤나무 열매에 비해 '감'은 그 크기가 몇 배지만, 끝까지 살아남아서 '홍시'가 되기까지,

비바람과 뜨거운 태양을 견뎌내야 하니 얼마나 힘든 일인가!


수열이의 홍시 따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사이, 언제 오셨는지 엄마가 옆에서 한마디 하신다.

" 다 따지 말고 까치밥은 남겨 두거라!"

이에 질세라 수열이도 한마디 한다. "어차피 꼭대기에 있는 홍시는 못 따요!"

나는 까치가 먹는지 안 먹는지 모르겠지만,

새들도  홍시 맛을 알게 되면, 살아있는 벌레 잡기보다 쉬운, '홍시'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홍시를 작은 옹기 항아리에 짚풀을 깔고, 그 위에 빨간 홍시를 차곡차곡 넣는다.

짚풀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홍시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키지만, 머지않아

내 차지가 될 것을 뻔히 알고 있다.

언니와 내가 공부할 때 엄마는 홍시를 내어 주시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 모두가 떠나 간 빈집을 감나무

홀로 지키고 있다. 낮에는 태양빛에 먹물이 든 볼이

발그레지고, 밤에는 달빛에  외로움의 무게로

스스로 몸집을 키운다. 그러다가 지치면

스스로 떨어질 것이다.  그곳엔 주우러 가는 아이들도

없다. 그저 스산한 한줄기 늦가을 바람만이

스쳐 지나갈 뿐ㆍㆍ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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