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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Mar 02. 2024

책, 책, 책

책을 다시 잡았다. 1년에 한 권도 읽지 않고 지낸 시간이 있다. 읽어도 두, 세 권에 그친 해도 있다. 마흔에 이직하고 그 회사에 적응한다는 핑계로 책을 잠시 놓았다. 그 사이 읽고 싶어 산 책은 머리맡에 계속 쌓여갔다. 손에 잡히지 않아 몇 년을 한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는 책들이었다. 그렇게 쌓이기만 하는 책이 부담스러워 사는 것도 멈추었다. 그러나 읽고 싶은 책은 계속 늘어나 메모만 해두었다. 언젠가는 사겠다고. 일과 관련된 책만 의무적으로 읽고 정작 읽고 싶은 책에 손이 안 가면서 마음에는 부채의식만 깊어졌다. 그러다가 2년 전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기 시작하니 가속도가 붙어 읽는 속도가 빨라졌고 재작년보다 작년이, 작년보다 올해 읽는 책 권수가 늘어나고 있다.


다시 손에 잡게 된 계기는 회사의 독서통신 교육이다. 매달 한 권씩 읽고 독후감을 내면 5시간 교육을 인정해 준다. 처음엔 그런 제도가 있는 줄 몰랐다. 팀원들이 독후감 결재를 올리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후 매월 초 공지가 뜨자마자 신청했다. 신청자가 많아 공지 뜬 날 바로 신청하지 않으면 마감이 금방 된다. 그래서 회의나 급히 처리할 일 등으로 깜빡 잊고 놓치는 경우는 정말 아쉬운 한숨이 난다.    


어렸을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 읽다가 밤새는 일이 잦았다. 책 읽고 그걸 책장에 꽂아놓는 일이 좋았다.

용돈이 풍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읽고 싶은 책을 적어놨다가 한 권씩 샀다. 책을 산 날은 책 표지 바로 다음 쪽, 빈 내지에 꼭 날짜를 적었다. 그리고 책을 세워 모서리를 잡고 윗면에 이름을 적었다. 동생들이 가져가지 못하게 하려고. 한 권을 다 읽고 나야 다른 책을 샀다. 여러 권을 사더라도 한 권씩 읽었다. 가끔 유명인의 인터뷰에서 동시에 책을 읽는다는 얘기를 들으면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용을 온전히 이해할까?, 읽고 나서 내용을 기억할까?' 와 같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렇게 읽고 있다. 가능하면 한 권을 다 읽고 난 다음에 다음 책을 읽으려고 하지만, 회사와 집에 책을 두고 두 권을 동시에 읽을 때가 있다. 아무 약속 없는 점심시간에 책을 읽으면 상당한 분량을 읽게 되어, 얇고 가벼운 책 위주로 갖다 놓는다. 다른 두 가지 책을 읽어도 책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웹소설도 동시에 여러 개를 읽는다. 무료 회차를 읽으려면 1화씩 끊어 읽어야 하는데, 여러 개를 읽어도 이야기가 헷갈리지 않는다. 정말 너무 흥미롭고 흡인력 있는 소설은 캐시와 쿠키 충전을 열심히 하며 끝까지 완주하지만. 이제야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다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집에 위인전집, 세계명작전집이 있었다. 친척 중에 책을 방문 판매하던 분이 있었는데, 엄마가 어쩔 수 없이 샀던 책들이다. 덕분에 이순신, 장보고 같은 위인들의 얘기와 폭풍의 언덕, 테스, 작은아씨들, 여자의 일생, 주홍글씨 같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시절에 읽었던 위인전에서 장보고의 본명이 '장궁복'이라는 걸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엄마가 강매를 당한 덕분에, 책을 좋아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독립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장을 맞춘 일이다. 서재를 갖는 게 꿈이었다. 책, 책상, 의자만 놓인 방. 거기에서라면 하루종일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책장을 맞추고 작가별, 장르별 구분을 한 후 책 크기를 맞추어 진열했다. 책을 잘 버리지 못해 중, 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 동생들이 결혼할 때 놓고 갔던 책도 꽂았다. 책장이 곧 꽉 찼다. 완전 부자가 된 것처럼 뿌듯했다. 그런데 책은 방이 아니라 침대 위에서 읽었다. 방은 책을 진열해 놓는 방이 되었다.


그 후 이사를 두어 번 더 할 때 책이 짐이 되었다. 한번 읽고 다시는 손대지 않는 책을 골라냈다. 처음엔 단 한 권도 책장에서 빼기가 어려웠는데, 이삿짐을 싸기 위해 정리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되니 버릴 수 있게 되었다. 대학, 대학원 교과서적, 속지가 누렇게 바랜 오래된 책을 버렸다.  그러다 중고서점을 알게 되었다. 책을 팔 수 있었다. 그런데 책 읽을 때 밑줄 긋고 끄적여놨던 책들은 팔 수 없었다. 새것처럼 상태가 좋은 건 값을 더 받을 수 있는 걸 안 후로는 책에 밑줄을 긋지 않는다. 구매일자나 이름도 적지 않는다. 책을 버리거나 파는 일을 터부시 했는데, 두 번 보지 않는 점을 감안하여 책을 없애면서 보기로 했다. 예전에는 꼭 사서 봐야 한다는 주의였는데 지금은 빌려서도 잘 본다.      


침대 옆 협탁에 놓였던 책 수가 줄어들고 있다. 줄어드는 만큼 책장의 책은 늘어가고 있다. 저 책꽂이에 공간이 없어지기 시작하면 중고책방에 팔 것이다. 비우면서 빌리거나 사볼 것이다. 나이든 탓인지, 읽었는데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일은 흔한 일이 되었다. 누가 들으면 읽었다고 거짓말하는 줄 알 거다. 어떤 책은 읽었다는 것조차 기억 못 해 또 사서 보는 일도 있다. 얼마 전 양귀자의 '모순'이 그랬다. 다행히 이 책은 빌려본 책이었는데, 중간까지 읽고 나서야 이미 읽은 책이라는 걸 깨달았다. 빌려봐서 다행이지 아니면 책 값이 아까울뻔했다. 아마도 책장에 꽂혀있었다면 다시 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책장에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또 샀을 수도 있다.


책은 소유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많이 벗어났다. 간직하고 싶은 책은 당연히 오래 갖고 있으면 된다.  한 번 읽고 말 책은 중고서점에 되판다. 팔았다가 몇 년 후 그 책을 또 사서 보게 되더라도. 책 값이 아깝겠지만, 그 책에 끌린 이유가 있을 테니 다시 보면 된다. 한번 읽었다고 영원히 안 볼 책은 이 세상에 없으므로. 그리고 또 팔면 된다. 이십 대 때 읽었을 때와 지금 읽을 때 느낌이 다른 책이 있다. 세상이 변하고 내가 변했기 때문에. 마치 처음 접하는 책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면 그 느낌대로 다시 읽으면 된다.


책이 충동구매 상품이라는 말을 듣고 속으로 의아했다. 난 항상 읽고 싶은 책 목록을 만들어, 그 안에서 구입했으므로. 그런데 후배와 서점에 갔다가 책 제목이 마음에 들어 계산대에 서 있는 나를 자각하고 깨달았다. '아아~ 책은 충동구매 상품이 맞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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