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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리 Sep 04. 2024

08 만약

유방암으로 인생 역전 (8)


  ‘만약’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 현실로 돌아올 때 푹 꺼지는 느낌이 싫어서다. 만약의 마법에서 깨어날 때면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뭣하러 이생각저생각을 했나 싶다. 


 그런데 그날은 여러 장면들이 우연히 겹치며  ‘만약 놀이’가 이어졌다. 거실에서 아들 OTT로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있었고 나는 주방에서 유튜브로 유방암 전문의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강의 내용은 9만 명이 넘는 인원을 11년-20년 가까이 연구해서 나온 결과라니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유방암 발병 즈음에 무엇을 먹었느냐보다 과거에 무엇을 먹었으냐가 훨씬 연관이 높다. 특히 10대 후반에서 청년기까지 먹은 음식이 유방암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나이에 고열량 식품이나 적색육, 가공육을 많이 먹으면 유방암 위험이 올라가고 그 연령대에 식이섬유를 충분히 섭취하면 유방암 위험이 낮아진다. 


  유방암 발병은 40대가 가장 높다는데 20~30년 전에 먹은 음식이 영향을 미친다니 놀라웠다. 내가 놀라고 있을 때 아들이 보고 있는 영화는 주인공이 과거의 자신에게  ‘NO!’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하는 장면을 송출하고 있다. 그래서 ‘만약 내가 과거의 나에게 ‘NO!’를 전달해야 한다면?’이라는 상상이 시작됐다.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어떤 하루가 떠올랐다. 


  과거의 그날 나는 고등학생이다.  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고등학생 때의 나는 커피우유와 밤만쥬빵을 입에 달고 살았다지. 그날도 손에 커피우유가 들려 있다. 짝꿍 순미가 말한다.  


“오늘 아침에 똥을 못 누고 와서 그런가 속이 더부룩해.”

“어제 똥 눴다고 하지 않았어?”

“어제 눴지. 그런데 오늘은 못 봤어.”

“뭐? 어제 눴는데 오늘 어떻게 나와?” 

“똥은 날마다 나오는 거잖아?”

“뭐? 똥을 날마다 눈다고?”

“이게 이상해? 너는 날마다 안 눠?”

“응. 1주일에 한번 정도 누는데?”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놀라 주위의 다른 친구들에게도 똥 누는 횟수를 묻기 시작했고 나 같은 배변패턴을 가진 친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에 와서 동생에게 물었다. 


“너도 하루에 한 번 똥 눠?”

“당연하지.”

“근데, 왜 그렇게  화장실서 빨리 나와?”

“3초면 나오니까. 언니는 안 그래?”

“응. 나는 몇 십분 걸려야 겨우 나오는데?”


 만약 그날의 나에게 메시지를 전해 줄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지금 너 만성변비야. 식습관부터 빨리 고쳐야 해. 빵, 우유, 커피를 끊어. 붉은 고기를 줄이고 야채와 과일을 많이 먹어. 식이섬유를 섭취해야 해. 지금 이대로 살면 49살에 유방암이 찾아와. 청소년기 식습관이 엄청 중요하대. 얼른 고쳐. 지금 나는 채소 위주로 음식을 바꿨더니 매일매일 똥을 눈단다.”


  이런 상상을 열심히 하다가 라면을 먹으며 영화를 보고 있는 19살 아들을 보니 이 상상도 헛되다 싶다. 엄마가 암환자인데도 본인의 식습관을 크게 고치려 하지 않는다. 과거의 나도 미래의 자신이 보낸 이상한 메시지를 들었다고 해도 귀담아 들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니 차라리 ‘88세의 나'(이하 88할망이라 칭함.)가 타임머신을 타고 와서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줄까?를 상상하는 게 더 낫다. 만약 그녀가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먹고 일로만 보자면 설탕, 커피, 유제품, 밀가루, 씨앗류 기름, 가공제품, 튀김, 술 등을 먹지 않고 채소 위주로 식사를 하고 있으니 ‘NO!’할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다. 


 “잘하고 있어. 고마워! 덕분에 내가 잘 살고 있지 뭐야? 계속 근육을 더 만들어 놓으시게. 소중한 사람들과 잘 지내시고, 아참. 글을 좀 더 써 주면 좋겠어” 


  88할망이 보내는 메시지를 맞게 수신하고 있기를 바라는 ‘만약 놀이’는 푹 꺼지지 않으니 즐겁다. 





from 51세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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