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으로 인생역전 (9)
사전에서 다행 (多幸)의 한자를 보고 있으니 이상하다. 한자로만 보면 ‘ 多(많을 다)’자가 쓰였으니 더 많은 행복, 헤아릴 수 없는 행복을 뜻하는 단어여야 하지 않을까. 요즘 내가 ‘다행’을 쓴 경우를 떠올리면 그렇지가 않다. ‘불행 중 다행이다.’, ‘휴~ 다행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 정도여서 다행이지.’ ‘다행’에 더 센 수식어가 붙어서 ‘천만다행’이라고 하면 우리는 더한 불행은 피했다는 안도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되지 않는가? 이렇게 ‘다행’은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순간과 딱 붙어 있다.
‘다행이다’라는 단어를 아름답게 포착해 낸 노래가사를 봐도 그렇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 보고 숨을 쉴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란 걸
-이적, '다행이다' 중에서-
노래 속에서 그대와 함께 하는 일상이 ‘다행’ 임을 고백하는 화자에게는 불행에 대한 감각이 있다. ‘거친 바람’을 맞으며 ‘젖은 지붕’ 밑에서 외롭고 힘들고 무의미하게 살았던 경험에 대한 기억 혹은 그런 상황을 그려볼 수 있는 감각 말이다. 그것 없이는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인생이라는 것이 원래 외롭고 힘들고 허무한 것이었다는 알아차림이 있었으므로 그대의 존재는 화자에게 놀랍고 그대와 함께 하는 삶은 의외적이고 뜻밖인 ‘다행’으로 다가온다.
나도 그랬다. 암이라는 불행을 만났을 때에 수많은 다행을 만났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 내가 직접 요리를 할 수 있다는 것, 가족들과 날씨 같은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 내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것... 그전에는 눈에 띄지도 않았던 행복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니 불행을 만났을 때 눈 감을 필요가 없다. 불행을 알아차린 자들은 ‘다행’을 알아차릴 수도 있게 되므로 더 많은 행복을 만나는 셈이지 않을까? 또 다행을 많이 만나다 보면 불행도 행복도 결국은 삶의 또 다른 얼굴일 뿐임을 알아차리는 행운까지 얻게 될지도 모른다.
from 51세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