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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리 Nov 11. 2024

14 공책 다짐

글쓰기를 배우는 시간 (14)

   우리 글쓰기 클래스에서는 2 권의 공책을 사용한다. 과제를 해온 공책은 제출하고 이번 주 과제는 다른 공책에 쓴다.   과제글에 강사들이 간단한 피드백을 한 후에 돌려준다. 글을 보고 수강생들의 상황에 맞게 다음 수업을 구성하는 것 같다.  강사는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나눠보자고 했다. 급우들은 글감을 찾는 어려움, 형식을 지키려다 생각이 막히는 현상, 내 안의 나를 캐내는 방법 등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시작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 어렵고 이런 시시한 글을 써서 뭣하지?라는 생각을 넘어가기 힘들다고 했다. 강사는 허무를 극복할 좋은 방법 또한 글쓰기라고 했다. 맞다. 내 고민을 포함하여 급우들의 고민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글쓰기에 대한 고민은 글쓰기 외에는 풀 방법이 없다.


  예전에 소설 하나를 구상하다 그만둔 적이 있다. 외계의 고도의 지적 생명체가 지구를 침략한다. 그들은 지구에 정착했고 인간은 애완동물의 지위로 전락한다. 야생의 삶을 선택하는 인간들도 있지만 펫의 위치를 선택하는 인간들도 있다. 지구의 정복자 중에는 인간의 삶을 보존하는 특별 구역을 지정하자는 이도 있고 펫으로서의 인간을 아끼는 이도 있다. 반면 인간을 학대하는 이도 있고 식용동물로 여기는 이도 있다. 구상하면서 짐작했다. 이 소설을 쓰게 된다면 나는 채식을 할 수밖에 없겠구나. 글쓰기란 그런 것이다. 무엇인가가 몸에 새겨진다. 고민하는 나는 알고 있다. 마무리를 지으려면 몸에 글이 새겨지는 과정을 껴안고 끝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강사는 말했다. “농부가 수확을 하려면 농사짓는 기간의 수고를 감당하잖아요. 글쓰기란 최고의 지적 성취물을 갖는 일인데 왜 수고하지 않으면서 수확만 하려는 거예요?” 맞는 말을 들으니 편하게만 살려고 하는 내 태도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럽다.  날씨 좋은 날을 골라 산책 삼아 몇 번 밭에 나가놓고 보기 좋은 수확물을 기대하는 도둑놈 심보를 가진 것은 아닌가? 글쓰기는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즐거운 지점까지만 하고 더 나아가려 하는 않는 데 내 문제가 있다. 그래서 시작만 하고 마무리를 못 짓는다. 진리는 간명하다. 쓰고 싶은 자는 쓰면 된다. 글을 잘 마무리하고 싶은 자는 글이 마무리될 때까지 놓지 않고 계속 만지작거리며 쓰면 된다.


  매주 제출하는 공책이 쓰게 하는 좋은 장치가 되어 줄 것이다. 마감일도 있고 독자도 있으니. 과제글도 쓰고 과제 아닌 글도 쓰면서 공책을 끝까지 채워보자. 이번 주 과제는 기억에 남는 책이나 사람에 대해 3 문단 이상 글쓰기이다.




인간일 뿐? 인간이기 위해!

                  -’안티고네’를 읽고



  안티고네에 대해 너무 많은 칭송을 들었을까?  읽기 전엔 이상적 인간을 만나겠다는 기대감으로 설렜는데 읽는 내내 바람이 빠졌다.  오이디푸스의 두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는 길에 방치된 오빠의 시신을 두고 딜레마 상황에 놓인다.  외국 군대를 이끌고 고국을 공격하다 죽은 그를 매장하는 자는 죽이겠다고 크레온 왕이 공표했기 때문이다.  안티고네는  이스메네와는 달리 왕의 명을 어기고 오빠의 시신을 매장한다.  화가 난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동굴에 가둔다. 크레온이 뒤늦게 상황을 바로 잡고 싶었을 때는 이미 안티고네가 죽은 뒤였다. 이 일로 크레온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약혼녀였던 하이몬도 자결하고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크레온의 왕비도 자결한다.


  내가 어느 인물의 상황에 놓이더라도 더 나은 선택을 했을 것 같지가 않아 독서 내내 으스스했다. 안티고네에게 기대 봤으나 그녀도 역시 인간일 뿐이었다. 신념대로 행동하는 인간을  기대했으나 신념을 증명하는 것에 매진하는 인간이 보였고, 신념과 지혜를 함께 가진 인간을 기대했으나 신념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돌진하는 인간이 보였다. 오이디푸스의 급한 성미는 살인을 불러온 반면, 안티고네의 저돌성은 왕의 횡포에 금이 가게 했으니 박수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안티고네가 오이디푸스의 상황에 있었다면 행동을 멈추고 상황을 판단해 볼 수 있을 것인가? 저런 성격이라면 오이디푸스처럼 했지 싶다. 한 나사가 모든 구멍에 다 맞을 수 없듯이 한 인간의 특성이 모든 상황에 선한 결과를 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치기 어린 시절 나는 천국의 삶이 중요하고 이 세상의 삶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안티고네가 이스메네를 대할 때의 태도에서 천국의 삶을 무시하던 사람들을 대할 때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너는 신들께서도 존중하시는 것을 경멸하렴!”, “너는 지금 핑계를 대고 있는 거야.”, “큰 소리로 알리지 그래. 네가 입 다물고 이 일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나는 네가 더 미워질 거야.” 안티고네가 잡혀오자 이스메네는 언니와 함께 벌을 받으려 한다. 안티고네는 거부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정의가 용납치 않아.”, “나는 말로 사랑하는 친구는 사랑하지 않아.” 죽은 오빠에게는 목숨 걸고 예를 지키려는 안티고네가 살아 있는 동생에게는 힘을 다해 경멸을 보내는 것 같다. 이 대목에서만큼은 그녀가 보인 덕성이란 것이 저승에 있는 자들에게 자신만은 잘 보이겠다는 개인적 이익처럼 보인다.


  공동체가 지켜온 신념과 그로 인해 형성된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는 면은 고결하다. 하지만 오빠가 아니라 남편이나 자식이었다면 “나는 결코 시민들의 뜻을 거슬러 이런 노고의 짐을 짊어지지 않았을 거예요.”라는 안티고네의 말에서도, 형벌이 확정되자 결혼도 못하고 외롭게 죽는다고 반복적으로 한탄하는 대목에서도 바람이 빠진다. 개인의 신념이 시대적인 한계를 벗어나기는 어렵겠지 하면서도 그녀의 신념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회의가 든다. 소포클레스는 작품 끝에 코러스의 입을 빌려 “지혜야말로 으뜸가는 행복이라네.”라고 말한다. 그녀는 지혜로웠나?라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그러다 나를 본다.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안티고네를 대하는가.  마음을 기댈 영웅을 찾으려 독서를 한 것인가? 인간의 결핍과 나약함을 절감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굴고 있다. 안티고네가 보여주듯이 인간은 모든 상황에 맞는 마스터키를 가지지 못한 존재다. 아무리 신중하게 내딛어도 인생의 모든 함정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다운’ 상태를 지키는 것도 지난한데 ‘인간일 뿐’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함부로 안티고네를 나무라던 나여! 그저 모든 상황에서 “신이여,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마음으로 자신과 타인을 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위에서 보지 말고 옆에서 봐야겠다. 오빠의 시신에 흙을 덮는 그녀의 손과 표정을. 다시 읽어야겠다.   




From 51세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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